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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mo Kang Mar 27. 2019

겨울, 눈, 기차. 그래서 홋카이도.

어느 지나간 겨울의 이야기다. 나뭇가지 끝에는 아직 가을이 남아 있었지만 겨울을 빨리 만나고 싶었다. 오타루가 배경인 어느 일본 영화를 우연히 다시 보게 되었고, 영화의 주인공처럼 먼 설산을 향해 잘 지내시냐고 크게 외쳐보고 싶졌다. 그 중학생들이 자전거로 달리던 길을 걷고 햇살이 바람에 실려오던 중학교 이층 도서관 창문 옆이 궁금해졌다. 불쑥, 홋카이도로 떠났었다.



오타루의 오래된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르다 하코다테로 떠나던 아침, 주인아저씨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신문을 보여준다. 오늘 홋카이도에 첫눈이 온대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오타루 역에서 오샤만베 역으로 가는 하코다테혼센(函館本線) 기차를 타러 갔다. 관광용으로 운행하는 증기기관차 SL(Steam Locomotive) 니세코 호가 먼저 떠난다. 증기기관차를 구경하려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니 플랫폼에는 단출한 두 량짜리 작은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 오타루를 떠나 잠깐 바다를 따라 달리던 기차는 어느 순간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작고 작은 산동네의 간이역들을 인사하듯 만나던 기차는 또 갑자기 쏟아지는 눈을 헤치며 달린다. 오타루 역의 에키벤 북해수망(北海手網)을 꺼내 창 밖으로 지나는 눈의 나라를 보며 먹는다. 게살과 연어알, 청어 알과 지단 등이 빼곡히 밥을 덮은 명물 도시락이다. 세 시간. 산을 내려온 기차가 바다를 다시 만나는 곳에서 기차를 바꿔 탄다. 왼쪽으로 바다를 끼고 달리는 특급 기차로 종점 하코다테에 내린다. 거짓말 같은 함박눈이 도시를 덮었다. 아, 북쪽 나라의 눈은 이렇게 오는구나. 거리의 붉은 트램도, 여학교 교정의 학생들도, 시장의 커다란 홍게들도 모두 함박눈 속에 있었다. 눈을 처음 본 강아지처럼 한껏 들뜬 채로 길을 걷고 눈을 맞았다. 아름다운 오후였다.



더 북쪽, 일본의 북쪽 끝 와카나이로 가보기로 했다. 동물원으로 이름난 홋카이도 제2도시 아사히카와에서 이른 아침  소야혼센(宗谷本線)을 탄다. 완행으로는 여섯 시간, 특급으로도 세 시간 반이 걸린다. 승객이 거의 없는 아침 기차는 북으로 북으로 쉬지 않고 달린다. 창 밖에는 단지 눈 덮인 벌판. 문고판 책을 읽던 중년 남자는 어느새 보이지 않고 다른 남자가 건너편에서 졸고 있다. 가끔 아이스크림을 파는 승무원이 지나갈 뿐, 기차는 해와 구름과 눈을 반복하는 변덕스러운 날씨를 뚫고 달린다. 눈이 많이 내리면 쌓인 눈을 헤치고 가는 제설도구를 단 기차도 다닌다고 했다. 작은 역에 내린 남자가 마중 나온 노모를 얼싸안는 뒷모습이 정겹다. 무심한 승무원은 깃발을 들고 기차는 다시 북으로 향한다. 와카나이. JR 홋카이도의 마지막 역이다. 일본 최북단임을 알리는 표지들이 여기저기 보이고 시내 교통표지판에는 러시아어가 병기되어 있다. 최북단 소야 곶에서 바로 마주 보이는 땅이 러시아 사할린 섬이다. 변방, 국경. 여행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곳이다. 내처 더 올라가고 싶지만 여기까지다. 돌아가야 한다. 에키벤을 사서 다시 삿포로까지 내려오는 남행열차를 탄다. 스산한 밤기차의 창밖으로 보이는 어둠이야말로 여수(旅愁)의 결정체다.



흐드러진 봄꽃의 화사한 분홍도, 묻어날 것 같은 가을 단풍의 선명한 붉음도 모두 아름다웠다. 시리도록 푸른 바다를 보고 있던 여름의 시간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시간이 쌓여 세월이 되고 나니, 가끔 커다란 눈이 소리 없이 내려오던 회색 하늘과 기차 창 너머로 끝이 없던 하얀 어둠이 그리울 때가 있다. 멋진 공항 라운지에서 비행을 기다리던 기억보다 낯선 나라 작은 간이역에서 철컹거리며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작은 기차를 기다리던 어느 밤의 기억이 간절할 때가 많아진다. 여행도 역시 사람의 일이라, 결국 돌아온 뒤 마음에 담고 나서야 그 색깔이 정해진다. 누군가에게 홋카이도는 초여름 만개한 후라노의 라벤다 색이겠지만, 나에겐 결국 초겨울의 하얀 어둠으로 남았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면 아주 조금씩의 나를 그곳에 남겨두고 온다. 살다가 지치거나 마음 둘 곳이 없어 힘이 들 때면 그 놓고 온 나의 일부들이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그 날 굿찬 역에서 본 눈꽃도 정말 아름다웠지. 아사리 중학교 앞 분식집 라멘은 참 따뜻했는데. 비바우시 게스트하우스의 만화책들은 지금 더 많아졌겠지. 1월이 지나면 오호츠크 바다의 유빙이 홋카이도 동쪽 바다까지 내려온다. 눈보라가 몰아치던 아바시리의 검은 바다 위 유빙에 위태롭게 서있는 어느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가 다시 생각난다. 어쩌나. 이 겨울, 다시 홋카이도에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2018년 12월, 어느 회사의 사보에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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