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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mo Kang Mar 22. 2019

미식도시 타이난(臺南)

타이완의 남쪽, 오래된 보석 같은 도시

남으로 달리던 완행열차가 드디어 타이난역(台南車站)에 멈춰 섰다. 오후 11시. 막차는 아직 플랫폼에서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지만 역전에서 기다리던 택시도 눈에 띄게 수가 줄고 역아래 지하도엔 이미 노숙자들이 자리를 잡고 누웠다. 타이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타이난의 하루가 끝나는 시간이 가깝다. 그래도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어두워진 역사에서 백 년 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무심한 눈빛으로 누군가를 기다린다. 한 명 한 명 갈 곳을 찾아 떠나고 아마 마지막 기차가 역을 떠나면 직원도 창구를 닫고 모자를 벗을 것이다. 밤 한가운데의 역을 둘러싼 드라마가 끝난다.



늦은 밤. 숙소를 찾아 골목을 돌기를 십여 분. 침대에 가방을 던지고 매니저에게 근처에 요기를 할 만한 곳부터 물어보았다. 노 프로블럼. 새벽까지 식당들이 문을 닫지 않을 거란다. 그러고 보니 국립 성공대학교 앞이다. 학생들로 붐비는 대학가의 어느 루웨이(滷味) 식당에 들어간다. 여러 가지 재료들을 직접 골라 바구니에 담아주면 적당히 요리해서 접시에 담아 나온다. 입안에 매콤한 맛이 감돈다. 타이완 비어 한 병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타이완 대학가엔 술을 파는 식당이 드물다.



이른 아침, 쓰차오(四草) 그린 터널부터 시작한다. 주말이라 일찍 서둘렀는데도 단체여행객들이 이미 줄을 길게 섰다. 맹그로브 나무 터널을 낮은 보트를 타고 한 바퀴 돈다. 거의 수면에 닿을 듯 늘어진 맹그로브 가지들을 스쳐 지나면서 어른들도 아이들도 한껏 들뜬 표정이다. 녹색 가득한 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그래. 나는 남쪽에 와 있구나. 타이완의 남쪽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 타이완에서 가장 오래된 400년 고도(古都) 타이난에.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타이난에 상륙해 젤란디아라는 이름의 성을 쌓고 동아시아의 근거지로 삼았다. 얼마 후 멸망한 명나라의 장수 정성공(鄭成功)이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반청복명운동을 폈다. 그래서 타이난에선 어디서나 정성공을 만나게 된다. 크고 작은 학교에 그의 이름이 붙어 있고 가는 곳마다 그의 동상이 있다.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사당에서 절을 하고 관광객들은 그의 얼굴이 그려진 기념품들을 고른다. 청일전쟁에 패한 청나라는 타이완을 일본에 넘겼고 ‘버려진’ 타이완 사람들은 반청의 상징이던 정성공을 다시 불러 내었다. 그가  외세를 몰아내고 타이완을 수복했던 도시, 타이난에.


타이난은 타이완을 대표하는 미식도시다. 타이난 미식기행에 대한 책이나 타이난 요리 레시피북이 넘쳐난다. 전주를 처음 찾게 되면 그렇듯 타이난에 온 여행객은 새벽 우육탕 노점에서 야시장 야식까지 시간이 부족함을 탓할 수밖에 없다. 맛보고 싶은 음식은 넘치는데 하루는 또 턱없이 짧다. 타이난을 대표하는 음식들 중 몇 가지만 소개한다.



타이난의 아침식사는 우육탕(牛肉湯)이다. 얇게 썬 신선한 소고기를 사발에 담고 뜨거운 육수를 부어 살짝 익혀 먹는다. 생강채를 소스에 찍어 함께 먹는다. 새벽부터 아침까지만 문을 여는 우육탕집들이 많아 이름난 우육탕을 맛보려면 여행객도 부지런해야 한다. 스무위조우(虱目魚粥)도 많이 먹는다. 남쪽 바다 생선 밀크 피시(슬목어)가 주재료인 죽으로 아주 담백한 맛이 난다. 노포 두샤오웨(度小月)를 유명하게 만든 음식은 단자이미엔(擔仔麵)이다. 새우머리로 낸 국물에 면을 말고 고기를 갈아 만든 양념을 얹는다. 분점이 여럿 있는 데도 늘 줄이 길다. 이미엔(意麵)은 도톰하고 넓은, 조금 단단한 밀면이다. 이태리(意大利)면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파스타 면과 식감이 비슷하다. 이미엔 위에 뱀장어(鱔魚)를 볶아 얹어내는 샨위이미엔(鱔魚意麵)도 타이난을 대표하는 면이다.  꼴뚜기로 국물을 내고 쌀국수를 말아내는 샤오주안미펀(小卷米粉) 식당 역시 시장 골목에 흔하다.



캉러(康樂) 시장의 좁고 어두운 골목 안에는 꽌차이반(棺材板)이라는 재미있는 음식의 원조 식당 츠칸(赤崁)이 있다. 네모난 식빵의 속을 파고 다양한 재료를 넣은 크림 스튜를 담아 바싹 구워 내는데 뚜껑을 덮은 모습이 나무 관과 닮아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와꾸에(豌粿)는 쌀가루를 물에 개어 작은 공기에 넣고 새우, 버섯, 돼지고기 등을 넣은 소스를 얹어 쪄낸다. 푸딩 비슷한 모양과 식감인데 달지 않고 짭조름한 맛이 난다. 여덟 가지 토핑을 얹는 빙수 빠바오빙(八寶氷)이나 과일빙수 등도 수십 년 노포가 즐비하다. 미식을 테마로 여행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여행안내소에는 한글로 된 타이난 미식 가이드 소책자도 있고 며칠씩 식당을 좇아다니는 미식가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느 도시나 야시장이 북적이는 타이완이니 타이난이라고 예외일 리는 없다. 요일별로 열리는 시장이 달라 타이난 야시장을 가려면 미리 확인할 필요가 있지만 어느 시장이고 특유의 분위기는 다르지 않다. 가벼운 의류부터 전자제품과 생활용품, 온갖 나라 음식과 음료에 놀거리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만드는 건 타이완 야시장의 독특한 매력이다. 어쩔까. 멀리서 온 여행자에게 타이난의 밤은 여전히 짧다.




한 가지 더.  17세기 마조(媽祖) 신을 섬기기 위해 세워진 대천후궁(大天后宮) 한 켠에는 월하노인(月下老人)을 모신 작은 사당이 있다. 이 큐피드 영감에게 인연을 비는 많은 남녀가 언제나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재미로 보기에는 너무 진지한 사람들이 많다. 이 곳의 월하공이 특히 영험한 모양이다. 잠깐 줄 뒤에 설까 싶다가 마음을 고쳐 먹는다. 이미 대만 각지의 월하노인들에게 부탁한 게 여러 번이라 혹 나중에 너무 많은 붉은 실이 연결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문득 들어서다. 사당 옆 가게에 가서 시원한 망고빙수나 한 그릇 하면서 정신을 가다듬는다. 타이난의 오후가 지나간다. 아직 가야 할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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