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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그릇 Aug 19. 2019

7. 엄마의 재혼

엄마의 인생을 선택할 권리

엄마의 첫 번째 결혼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결혼도 좋지 않게 끝이 났다고 한다.

300만 원이라는 헐값의 위자료와 함께 내팽개쳐진 엄마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 시절에 이혼한 여자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나는 겪어보지 않았으므로 짐작만 할 뿐이다. 때때로 버팀목이 되어 주는 스쳐가는 인연들이 있었던 듯하다. 그렇다고 해도 엄마의 삶이 수월치 않았음은 분명하다.


내가 일본에 오고 난 후, 엄마에게는 새로운 인연이 생겼다.

처음에는 기분이 이상했다.


엄마가 연애를 한다.

엄마에게 나 아닌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


내 안에 어린아이가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마치 엄마를 빼앗기는 것 같았다.

일본으로 떠나와 자주 찾아갈 수도 없고, 외로운 엄마의 옆을 지켜줄 수도 없으면서 나는 이기적 이게도 엄마가 그 자리에 그대로, 나의 엄마로만 있어주기를 바랐다. 한 번쯤은 나만을 위해서 살아주기를 바랐다.

조심스럽게 반대의 의사를 피력해 보았지만, 엄마는 그분의 옆자리를 택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엄마는 엄마 자신이 우선인 사람이라는 것을.



6살짜리 딸을 두고 집을 나간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무능력하고 불성실한 아버지는, 장인 장모의 주선으로 어렵게 구한 일자리도 조금만 힘들고 비위가 상하면 금세 박차고 나와버리는 사람이었다. 돈만 못 벌어 오는 게 아니라 폭력도 휘둘렀다. 술만 마시고 들어오면 욕하고 때리고. 나라도 버티지 못했을 거다. 그런 아버지를 버린 엄마를 백번 이해한다. 하지만 생각한다.

'나를 데려갈 수는 없었을까?'


다행히도 아버지는 나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그런 아버지 곁에 나를 버려두고 간 엄마의 선택까지 이해할 수 있는 쿨함이 내게는 없다.

혼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일단 살기 위해 도망쳐야 했을 거야. 나까지 데리고 갈 여유가 없었겠지. 훗날에라도 데려가려고 했을 거야. 이혼 소송까지 가면서 양육권 다툼이 있었겠지. 김 씨 집안에서 절대 양보할 리 없었을 테고. 여자 혼자 몸으로 아이를 양육할 엄두도 나지 않았을 거야. 그래, 그래서 나를 데려갈 수 없었을 거야.’


그렇게 나는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나중에 엄마에게 들어서 안 사실이지만, 타지방으로 가 있는 엄마를 아버지가 찾아가 읍소했다고 한다. 애가 말을 안 한다고.

기억은 안 나지만 어린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었나 보다. 그리고 그런 나의 무언의 항의에도 엄마가 돌아오지 않자 마음을 닫았나 보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시절의 나를 찾아가 안아주고 싶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다.

엄마가 없다고 인생 끝나는 거 아니라고. 생각보다 견딜만하고 즐거운 일도 있을 거라고. 그러니 너무 주눅 들지 말고 네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라고.

6살 아이가 알아들을 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엄마가 나를 데려갔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어쩌면 더 험난해졌을지도 모른다. 더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수도 있고, 아버지가 여러 번 바뀌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상처 받고 엄마와의 사이도 더 어긋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차라리 할머니 품에서 자란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비록 마음의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로 자랐지만, 때로는 시골의 풍경이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위로해주기도 했다. 할머니의 사랑을 받았고, 고모와 삼촌의 돌봄을 받았다.

그것들이 나의 텅 빈 마음을 완전히 채워주지는 못했을지언정, 나를 지탱해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가정들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엄마와 함께였을 또 다른 나의 인생이 못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춥고 가난하더라도 엄마 품은 따뜻하지 않았을까, 덜 외롭지 않았을까.

어떤 시련도 서로 의지하며 이겨낼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현실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나도 안다. 엄마에게 그 고난을 다 감당하라고 누가 강요할 수 있을까. 자식인 나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를 버리고 간 것은 엄마의 선택이다. 그 선택으로 내가 상처 받았을지라도 엄마에게는 엄마의 인생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나는 그 권리를 존중하고 싶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누구도 나에게 엄마를 온전히 이해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모순된 마음일지도 모르겠지만, 엄마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과 엄마의 선택을 지지하는 것은 나에게 전혀 다른 문제이다.

엄마의 선택을 존중하지만, 그 선택이 최선이었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6살의 나에게 선택의 권리가 주어졌다면 나는 엄마와 함께하는 삶을 택했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앞 일을 내다보지 못하는 철없는 어린아이의 선택이라 할 지라도.



어쨌거나 엄마는 또 한 번 나를 져버리는 선택을 했다. 당시에는 그것이 서운하기도 했고, 내 안에 잠자고 있던 6살 어린아이가 또 한 번 버림받았다고 울부짖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당연한 엄마의 권리라는 것을 알며,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나도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이루었다. 만일 엄마가 여전히 혼자였다면 신경도 쓰이고 솔직히 부담스럽기도 했을 것 같다.

외국에 나와 그리 넉넉하지 않은 생활을 이어가면서 엄마를 부양할 수도, 엄마의 노후를 책임질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니까. 물론 나에게 그런 의무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각자의 인생을 산다. 어쩌면 이게 바람직한 모습일 수도 있겠다. 엄마가 자식을 위해 무조건 희생하는 것이 당연시되지 않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으므로.

나 역시 내 자녀를 위해 그렇게 할 생각이 없다. 두 자녀의 양육을 위해 경단녀의 삶을 살고 있고, 다시 사회에 복귀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기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이 또한 나의 선택이다.


다만, 씁쓸한 마음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단 한 번이라도 엄마에게 내가 최우선 순위였던 적이 있었을까?

나만을 위한 선택을 엄마가 한 적이 있었을까?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좀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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