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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그릇 Aug 05. 2019

하굣길의 추억

불량식품과 생라면의 유혹

나에게 어린 시절은 그렇게 좋은 기억이 아니다. 늘 우울했고 풀이 죽어 있었으며 많은 것을 참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 댁 주변의 자연환경을 떠올리면 내가 좋은 곳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곤 한다.



마을 입구에서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 중간에는 크지 않은 과수원이 있었고, 주변에 둘러진 아카시아 나무에 꽃이 필 때면 기분 좋은 향기가 코 끝을 간질였다.


마을 깊숙이 들어가면 그리 높지 않은 산이 있었는데 마을에 접한 쪽은 나무가 없는 언덕배기였기에 마을의 공터와 더불어 그곳은 곧잘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곳에서 숨바꼭질도 하고, 도시락을 싸 들고 올라갔다가 개미떼에게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겨울이면 비료포대를 깔고 눈썰매도 탔다. 요즘은 이상 기후로 폭설도 내리고 하는 모양이지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남쪽 지방에 눈 다운 눈은 1년에 한 번 내릴까 말까 했다. 그마저도 금세 녹아버리기 일 수였기에, 눈썰매는 산자락에 쌓인 얼마 안 되는 눈이 녹기 전에 잠깐 즐길 수 있는 놀이였다.

겁이 많았던 나는 주로 동네 친구들이 타는 것을 구경만 하다가 경사가 완만한 곳에서 어렵게 용기를 내야 겨우 탈 수 있었다.


마을을 통과하면 온통 논과 밭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 어디쯤 개천이 흘렀다.

여름이면 그곳에서 물놀이도 하고 개천 주변에서 물에 젖은 흙을 집어 이것저것 만들며 놀기도 했다.

좀 더 깊고 유속이 느린 곳에서는, 친구 오빠가 통나무를 이어 만든 뗏목을 탔던 기억도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학교에서 집으로 걸어가던 하굣길의 풍경이다.


논과 논 사이로 2차선 도로가 나 있었고, 도로 양 옆으로는 풀밭 길이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을 나는 무수히도 많이 걸어 다녔다.

봄이면 개구리가 뛰어다니고, 수시로 뱀이 출몰했다.

사실 살아있는 개구리보다, 지나가는 자동차에 치어 납작해진 개구리의 시체를 더 많이 봤다. 요리조리 피해 걷다 보면 제대로 걸을 수 있는 걸음이 얼마 안 될 정도로 수많은 개구리가 그곳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함께 걷던 친구와의 수다에 심취해 있다가 내 발 바로 앞으로 스르륵 지나가는 뱀을 보고 기겁했던 적도 있었다.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었고, 그 위를 잠자리들이 날아다녔다.

겨울에는 잘려나간 벼의 밑동을 밟으며 마른논을 가로질러 걸어가기도 했다. 그러면 조금 더 빨리 갈 수 있었지만 울퉁불퉁한 논 길을 걷다 보면 더 빨리 지치기도 했다.


편지봉투 가득 코스모스 씨앗을 채집해서 학교에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


등교는 주로 버스를 이용했지만, 하굣길은 좋든 싫든 걷기를 택하는 날이 많았다.


어느 날은 준비물 챙겨 오는 것을 깜박하여 아침에 학교 앞 문방구에서 준비물을 사느라 차비를 써버려 걸어가야 했고, 또 어느 날은 버스를 놓쳐 걸어가야 했다.

지금처럼 몇 분 뒤에 버스가 도착한다는 안내판도 없었고 버스정류장에 시간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충 이때쯤 온다는 기억으로 버스를 기다렸는데 그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았기에 버스정류장에서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기는 지루했다. 그래서 학교 운동장에서 놀면서 버스를 기다리곤 했는데 노는 것에 빠져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어느덧 정류장을 지나쳐 버린 버스의 옆모습을 야속하게 바라보게 되는 일이 생기곤 했다.

그런 날은 주머니에 있는 버스비를 털어, 지금은 불량식품이 되어버린,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간식을 사서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아껴먹었다.


어떤 날은 간식의 유혹에 못 이겨 버스 타고 편하게 집에 가기를 포기하고, 힘들지만 간식을 먹으며 걸어가기를 택하기도 했다. 간식을 다 먹고도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이 한참 남았을 때, 내 옆을 지나쳐 가는 버스를 바라보며 '그냥 버스 타고 갈 걸'하고 후회한 적도 많았다.


아폴로, 쫀듸기, 호박꿀, 맛기차, 오브라이트 롤(먹는 테이프)을 주로 사 먹었다. (출처:나무위키)


배가 많이 고픈 날은 가성비가 좋은 생라면을 골랐다.

봉지를 뜯기 전에 우선 라면을 적당히 부서뜨리고(이 적당히가 매우 중요하다. 덩어리가 너무 크면 스프가 적게 묻어 싱거웠고, 너무 으스러뜨리면 라면이 스프에 파 묻혀 집어 먹기 몹시 힘들었다. 먹고 나면 검지와 엄지손톱에 라면 스프가 빼곡히 끼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봉지를 뜯어 스프를 솔솔 뿌린 다음, 봉지 입구를 움켜쥐고 혼신의 힘을 다해 흔들어주면 군침도는 생라면 간식이 완성된다. 기름에 튀긴 고소한 면과 매콤하고 짭조름한 스프의 조화라니. 비록 다 먹고 나면 입 안은 찝찌름하고 속은 니글거리곤 했지만, 먹는 동안은 더없이 행복했다.

(글을 쓰다 보니 물도 음료도 없이 이걸 어떻게 먹었나 싶다. )


친구와 함께 인 날도 있었고 혼자 인 날도 있었다. 운이 좋으면 가끔씩 동네 어귀까지 태워주는 분들도 있었다. 지금이야 함부로 모르는 사람의 차를 얻어 타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 지 알지만, 그때는 그저 태워준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운이 좋다(속된 말로 땡잡았다)고 생각하며 흔쾌히 차에 올라탔다. 다행히 나쁜 의도를 가진 어른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 걸음으로 한 시간이 걸리던 그 하굣길은 억눌린 나의 어린 영혼이 마음껏 활개 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자 공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걷는 내내 공상을 했고, 듣는 이가 없었기에 드라마에서 봤던 배우의 대사도 따라 해 보고 소리 내어 마음껏 노래도 불렀다. 저녁노을과 하늘나라 동화가 나의 애창곡이었다.

그때 불렀던 동요를 지금 내 아이들에게 자장가로 불러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하굣길의 풍경이 마음속에 그려지곤 한다.



꽁꽁 얼어붙은 마음으로 지나 온 시절이었다. 마음 둘 곳이 없었고, 마음을 두지 않았기에 고향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그곳에 문득 가고 싶어 졌다. 내 영혼이 자유롭던 그 하굣길이 너무도 간절히 걷고 싶어 졌다. 이런 게 향수병이라는 건가.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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