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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Jul 28. 2020

죽음 그 너머에는...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고 그리고... 그 이후도 있으려나.


보이지 않는 그 너머를 생각하게 된 것은 십여 년 전 죽음을 구체적으로 지켜보게 한 부모님의 마지막 역할로 인해서다. 이런게 죽는다는 거야... 한 일주일 편찮으시다 돌아가신 아버지나 일 년여 누워서 침묵으로 일관하시다 가신 엄마는 자식들에게 죽음 또한 이런저런 모습이 있음을 알려주고 가신 거다. 부모는 한 세대를 앞서 살면서 그 삶 자체가 다음 세대에 거울이 된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때 나의 인식에 스며든 죽음은 삶의 정반대가 아니라 그 연장선으로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것은 엄마, 아버지에 대한 이별의 슬픔과 그리움이 한몫했을 지도 모른다. 지금은 나의 오래된 신앙심이 햇살이 되어 어렴풋한 안개마저 걷어내고 있다. 40여 년을 함께 했던 세월의 관성이 아직도 어딘가에 계실 것 같은 느낌으로 남아있다.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놀랐다. 말 그대로 화면에 사람 반, 귀신 반이 나오는 납량물을 몇 시간째 보고 있는 것이다. 공포가 주는 짜릿함도 인간의 쾌락적 본능 어딘가에 해당되는지. 혼자 살게 된 이후로는 절대 무서운 건 보지 못한 나였기에 의외였다. 화면 속의 귀신이 피눈물을 흘린 채 눈동자를 빤히 뜨고 노려보는데도 나는 과자를 바사삭 씹으며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근데 눈에서 피눈물? 따가울 텐데. CG 인가? 요즘 많이 발전했군... 옛날 같으면 그 장면이 나의 뇌리에 박혀 그날 밤 꿈속에 생생한 3D 영상으로 괴롭혔을 텐데. 지금은 무덤덤하다.


16부작 전편을 다 보고 나서도 여전히 무섭지가 않았다. 특수효과나 촬영기법의 발달로 고화질 화면 속의 귀신들이 튀어나올 만도 한데 오히려 공포는커녕 연민이 느껴진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사람을 해코지할 수도 있지. 알고 보면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나타나는 건데 사람들은 지레짐작 무서워 호들갑이나 떨고... 아, 나이가 드니 귀신도 이해의 범주에 포함되면서 공포감이 사라지게 되나 보다. 어찌 보면 귀신을 포함한 영의 세계 또한 인간의 상상물만은 아닌 것 같다.


‘음우’라는 말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돕는다는 뜻이다. 조상의 영혼이 곁에서 도와주는 것일 수도 있고 기독교에서는 성령의 도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신경정신과 의사가 지은 ‘파워 오브 러브’라는 책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친척, 지인의 영혼들이 보이지 않을 뿐 자신의 주변에 항상 맴돌고 있다고 한다. 아이비리그 출신으로 초자연현상 같은 건 믿지 않았던 저자는 지금은 최면, 전생, 환생 등을 통해 환자를 치료한다.


무당이 접신한다는 것은 그들의 직업상 그렇다 쳐도 ‘던칸 맥두걸’이란 미국인 의사는 실험을 통해 영혼의 무게가 21g이라고 주장하고 소설가 공지영은 ‘수도원 기행’에 자신은 실제 귀신을 자주 본다고 썼다. '무진기행'을 쓴 작가 김승옥도 특이한 체험을 했다고 한다.


1981년 4월 26일 새벽, 하나님께서 내 영안(靈眼)을 여시고 그분의 하얀 손으로 내 명치를 어루만져 주시며, "누구냐?"고 묻는 내 질문에 분명히 한국말로 "하느님이다."고 대답하시는 체험을 했다. (중략) 1983년 10월 어느 날 오전, 워커힐 쉐라톤호텔 일실에서 부활하여 살아 계신 예수님의 전신이 내 옆에 발현하셨다. - 『내가 만난 하나님』 11~12쪽, 김승옥 지음-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다음 해인가 캠핑 갔을 때 겪은 일이다. 한밤중에 자다 일어나 화장실을 해결하는 중에 잠결인데도 뭔가 인기척을 느꼈다. 잠시 후 뒤를 돌아보았는데 바로 뒤에는 내 차가 있었고 엄마가 늘 앉으시던 뒷자리 창문이 반쯤 열려 있는 게 아닌가. 낮에 주차할 때 벌레 들어올까 봐 창문을 다 닫았던 기억이 나는데... 창문 넘어 마치 나를 보고 있는 듯, 보이지 않는 엄마지만 느낄 수 있었다. 순간 잠은 달아났고 한밤의 적막 속에 무섭기는커녕 나는 차의 뒷좌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가끔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가 현실과 접할 때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간섭이랄까. 아직도 빛은 입자성과 파동성 중 딱 어느 하나라고 단정 짓지 못한다. 두 가지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기에 21세기를 불확실성의 시대라 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죽었는지 살았는지 상자를 ‘까보기’전에는 전혀 알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이 최첨단을 달리는 양자역학을 통해 드러났다. 관측에 의한 상호작용이 매개가 된다는 양자역학 이론에 따르면 우주가 여러 개일 수도, 영의 세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과학의 발달이 오히려 불확실성에 이르고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초자연을 수용하게 되는 경향은 그 맥을 같이한다 하겠다. 과학과 종교가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결국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융합이 화두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나는 개인적으로 관대해졌다고나 할까. 관점이 여럿이면 이해심도 많아지고 사고의 폭도 넓어지는 것 같다. 젊은 날의 타협 없는 결기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을까.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내려다보면 다 얽히고설켜서 통하지 않는 게 없거늘, 이것 따로 저것 따로임을 우긴다면 시대에 역행하는 마인드일 것이다. 이럴 땐 세월이 우리 편인 것 같다. 주름이 깊어지는 만큼 사고도 깊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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