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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Oct 18. 2020

나는 항상 가렵다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다고 다 편안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순간에도 내면의 갈등은 치열하다.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까 보자기로 보이고 가만가만 있으니 가마니로 보이냐? 싸움 걸 때 첫 포문은 이런 말로 시작하련만 나에겐 오히려 '가마니'로 보이는 편이 다행이다. 가려움을 숨길 수 있으니... 여기저기 긁적이고 싶은 욕구가 열 손가락을 선동해 온몸에 오선줄을 남기고자 하나 그물망 같은 사람들 시선에 걸려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다 갑자기 어딘가 따끔거리며 가려움이 폭발하면 손은 나도 모르게 현장으로 달려가 응급처치를 하게 되고 그것이 발단이 되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려움이 연쇄반응으로 일어난다. 여기도 저기도. 동분서주, 좌충우돌, 우왕좌왕... 한자로는 정확하게 쓰진 못해도 손으로는 장황하게 표현한다. 야구감독이 선수들에게 사인하듯 양손이 바쁘다. 이쯤 되면 평온한 일상이 무너진다.


푸르른 젊음의 끝자락에서 아토피가 발현했다. 그동안 내 몸속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다가 기지개를 폈던 걸까. 잘 먹고 있던 복숭아를 갑작스러운 알레르기 반응으로 못 먹게 되었을 때보다 괴로웠다. 안 먹을 수는 있어도 안 긁을 수는 없으니까. ‘애들 때나 겪는 질환을 다 커서 이게 뭐람, 모냥 빠지게’ 라고 되뇌면서도 손은 여기저기 가만있질 못한다. 안 그래도 코로나로 무심결에 얼굴 만지는 것은 위험하다 했는데 아토피가 코로나를 이겼다. 다른 부위보다 얼굴 가려운 것이 제일 참기 힘들다. 코로나로 위협해도 손의 종횡무진을 막을 순 없다.


늙어가는 것이 낡아가는 것의 다름 아님을 느낀다. 새 차를 뽑았을 때 매일 닦고 조이고 기름칠해도 어느샌가 흠이 생기고 덜덜거리기 시작하듯 살아가면서 젊었을 때의 '쨍쨍함'을 하나둘씩 잃어간다. 정도야 어쨌든 지병 한두 개쯤은 영광의 상처인 양 달고 사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자동차처럼 부속품이 있는 것도 아니니 낡음을 고스란히 겪어야겠지만 왠지 그러기엔 인간이 너무 나약해 보인다. 강인한 뭔가가 있을 터인데, 무엇일까.


어느새 20 년이 지난 지금은 아토피에 감사할 따름이다. 반전은 영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참 긁고 나면 내가 오늘  먹었나 점검하게 된다. 아토피의 특성상 성인인 경우  원인이 스트레스와 유해물질 자극이란다. 과자나 라면 등의 인스턴트를 먹은 뒤에는 반드시 댓가를 치르게 마련, 처음에는 그런 제한이 불편했으나 역설적이게도 나를 자유케 하였다. 오히려 가공식품에서 해방된 것이다. 입이 심심하거나 스트레스 받을  절로 손이 갔던 것들이었는데 이제는 별로 당기지 않는다. 노력을 하면 보상이 따르는 , 인스턴트를 멀리하니 당연히 몸이 청정해진다라는 순리가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애를 딛고 일어선 인간승리다. 거창한 표현이겠지만 스스로 위로하고 싶다.


아토피가 아니었다면 지난날의 식습관을 그대로 답습했을 테고 그 결과물로 아토피보다 더한 놈이 나를 괴롭혔을 거라 확신한다. 밥상에서 조금이라도 파울을 하게 되면 심판인 아토피가 옐로카드를 높이 쳐드니 일상으로부터 퇴장당하지 않기 위해 규칙을 지키는 수밖에. 채소와 과일, 물, 생선은 가까이 하고 육류나 유제품, 특히 인스턴트는 멀리할 것. 아직까지 완벽하게 따르지 못해 여전히 가렵긴 하다. 그래도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고 그걸 지켜보는 심판이 있고, 그래서 나의 건강을 지키고 있음이다. 언젠가 완벽한 식생활을 이루었을 때 아토피도 종료 휘슬을 울리고 경기장을 떠날 거란 희망이 있다.


아니... 이젠 완벽하니 하산하거라. 20년 지기 스승이 나에게 말했으면 좋겠다. 죽을 때까지 먹어야 하는 인간에게 이보다 더한 스승이 어디 있으랴. 섭생이 곧 인생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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