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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Dec 02. 2020

12월의 카드

언제부터인가 플라스틱 네모난 카드는 지폐를 몰아내고 지갑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지폐는 없어도 카드는 꼭 가지고 나가야 편리함을 동반한 경제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돈은 쓰는 대로 다 지갑에서 빠져나가지만 카드는 살짝 긁고 다시 지갑으로 복귀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소비에 둔감해지게 마련이다. 매월 25일, 카드는 한 건의 누락도 없이 그동안 긁은 것을 모아 모아 청구서로 내밀지만 밋밋한 종이 위에 적힌 담담한 숫자의 나열일 뿐 날카로운 칼이 되어 소비심리를 끊어놓지는 못한다. 월급날이 든든히 받쳐주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 월급날도 25일인 것은 우연일까 상술일까. 결제일을 변경하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다. 하지만 타인 명의의 카드라면...


널 위해 만들었어.


라는 멘트와 함께 여자친구에게 카드를 내민다면 핀테크인 이 시대, 능력 있는 남자로서 멋진 선물이 될 것이다. 과거의 백지수표에 버금가고 요즘의 향기 나는 돈다발보다도 각광받는 궁극의 결정판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일, 카드의 유효기간은 두 연인이 헤어지거나 아니면 결혼하는 날까지 일게다. 결혼 후 회계가 일원화되면 그 카드도 내 계좌와 무관치는 않으리니 어쩌면 카드는 선물이 아니라 결혼하기 위한 미끼일 수도... 다시 한번 멘트를 날려본다.


널 위해 만들었어.


그리고 때는 바야흐로 20여 년을 거스른다. 딱딱하고 미끈한 느낌의 플라스틱 카드는 질감 있고 오돌한 재질의 종이카드로 바뀌고 대신 사이즈는 좀 늘어난다. 게다가 접은 종이로 안에 속지도 붙어있다. 무엇보다 물감이든 색연필이든 정성을 다해 핸드메이드로 도안한 것이며 추운 계절을 녹이고도 남을 따뜻한 글귀가 손글씨로 적혀있다. 메리크리스마스 앤드 해피뉴이어도 빼놓지 않고 지면 반대쪽을 채운다. 카드를 건네는 손도 받는 손도 희미한 떨림이 느껴진다. 그 맛에 밤새 만든 거고 어쩌면 일 년을 설레며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 카드는 유효기간도 없이 추억에 남을 것이다. 이제는 흑백의 레트로 필름처럼 머리속에 그려지지만 이맘때쯤 단체로 전송되는 모바일 연하장을 보면 색깔만큼은 알록달록해도 별 느낌이 없다.


벌써 12월인데 저작권료의 과민반응으로 캐럴도 들리지 않고 종이카드가 진열되는 크리스마스 풍경도 많이 사라졌다. 날씨도 옛날만큼 춥지 않다. 가뜩이나 세월의 풍화로 오돌토돌했던 감성도 신용카드처럼 밋밋해졌는데 무엇으로 크리스마스 기분을 낼까. 질감이 사라진 이 나이를 어찌할꼬. 갑자기 촛불 꽂은 케이크가 먹고 싶어진다. 눈으로도 귀로도 되살릴 수 없는 기분을 맛으로라도 느끼고 싶다. 생일 때나 먹는 케이크가 뜬금없이... 아, 예수님 생일이지~ 어쨌든 12월 25일 만큼은 카드 청구서가 아닌 카드 연하장이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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