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재밌는 영화를 봤다. 미소가 빵 터져 폭소가 되고 스토리가 흘러가는 굽이굽이 예상을 뒤엎는 여울을 만나 재미에 휩쓸리다 보니 두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동물원에는 정작 동물들이 없다. 동물원이 파산을 맞자 빚쟁이들은 사자나 곰이나, 돈이 될만한 동물들까지 모두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폐장된 동물원은 경매에 넘어갔고 새로 인수한 회사에서 파견된 신참내기 동물원 원장은 주연 없이 막을 올려야 하는 모순된 상황에서 나름 기발한 해결책을 찾아낸다. 그것은 바로... 동물의 탈.
설마 동물원에 동물들이 가짜겠어? 설마의 법칙에 기대어 직원들은 사자나 곰 같은 주요 동물들의 탈을 쓰고 기꺼이 우리 안의 볼거리가 된다. 탈바가지 안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도 동물원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에 관람객 앞에서 사자가 되고 곰이 된다. 모습에 걸맞은 습성까지, 고릴라는 가슴을 두드린다. 그런 열연(熱演)이 사람을 속인다기보다는 그러니까...
무려 백억이 넘는 제작비의 대부분이 사자, 곰, 고릴라, 나무늘보, 기린을 만드는데 쓰였다고 하니 그래픽으로 삽입된 실제 곰보다 동물의 탈이 더 리얼했다.
음... 동물을 살리는 것이다. 동물원이 없으면 남아 있는 동물들도 살 수 없기에 직원들은 각자의 역할에 몰입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 내가 사람인지 동물인지 물아일체에 빠지며 아이덴티티에 혼돈이 오는 순간, 더운 여름날의 땡볕에 열받은 곰이 급기야... 관람객이 던져 준 콜라를 마시고 만다. 그것도 코카콜라를. 이 장면은, 한때 유행했던 광고를 백 프로의 싱크로율로 관람객들에게 상기시켰고 이에 사람들은 환호했으며 동물원은 대박을 치게 된다.
어라? 북극곰이 진짜 콜라를 마시네~
이렇게 소품과 세트가 받쳐주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모티브가 된 영화는 씨줄과 날줄이 촘촘히 짜인 융단이 되어 동물원을 날아다녔다. 영화가 끝나고 그 여운이 아쉬워 리뷰를 찾아봤다. 네이버 별점 7.31, 왓챠평균 2.9... 씁쓸했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영화의 평이 고작 이것밖에 안되다니. 갑자기 두 시간의 웃음에 찬물을 끼얹었다. 사람들이 이상해, 난 재밌게 봤는데, 나는 투덜댔다. 그런데,
혹시...
내가 이상한 게 아닐까. 나의 평가 기준이 시간의 흐름에 흐릿해진 건 아닌지. 분명 유행을 넘어 시류라는 게 있긴 하겠지만 변치 않는 기준이 있을진데 과녁을 빗나간 화살마냥 머쓱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아재개그'처럼 올드패션의 문제가 아니다. 코믹, 액션, 롤코나 스릴러 같은 취향의 문제도 아니다. 어느 장르에서나 필요한 개연성 있는 탄탄한 스토리를 즐겼기에 높은 점수를 준 건데 나만 호평했다면, 짜임새 있는 구성이 이젠 영화에서 별로 호응을 받지 못한다는 얘기다. 아니면 탄탄한 스토리의 기준이 바뀌었든지.
언제부턴가 지하철의 빈자리가 내 옆이 마지막으로 채워지는 것에 서운해졌고 날로 변하는 트렌드에 일상을 맞춰나가는 것이 버겁기 시작했다. 즐겨 이용하던 인터넷 홈페이지가 어느 날 새롭게 단장되거나 늘 가던 마트의 매장 진열대가 바뀌면 짜증부터 났다. 변화의 물결을 '변질의 구정물'로 인식하면서 그냥 익숙한 것에 제자리걸음인 양 안주하며 살아왔나 보다. 그사이 세상은 나를 중심에서 밀쳐냈다. 나의 정치성향도 들판으로 내몰렸고 젊었을 적 푸릇했던 가치관도 이젠 녹슬어 무르팍만큼이나 삐걱댄다. 하지만 모든 게 단지 올드 해진 것일 뿐 그릇된 건 아니지 싶다.
내 나이 오십 대 중반, 한창때의 나이에서 멀어졌지만 그것은 신체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지 사리분별의 기준으로는 지천명을 찍고 여전히 미답의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고 자부한다. 이제서야 부는 바람에도 일렁이는 꽃잎에도 저마다의 이유가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나이 든 노인의 축 처진 어깨 위에 세월의 무게감이 있을지언정 그 눈빛과 말투에는 그만큼의 지혜가 묻어난다. 오랜 시간 동식물의 퇴적이 석유와 석탄으로 변하고 마침내 세상을 움직이는 에너지가 되듯, 인생살이의 퇴적도 세상을 밝히는 지혜가 됨을... 아, 벌써 여기저기 '노땅'이니 '틀딱'이니 하는 원성이 들리는구나. 이어지는 하품 소리에 나의 푸념이 묻힌다. 노인이 생을 마치면 한 개의 도서관이 사라지는 거라 했는데, AI가 도서관을 통째로 삼키고도 남을 이 시대에 얼토당토않는 소리라는 건 안다. 그래도... 뭔가가 씁쓸하다.
‘해치지않아’ 영화 한 편이 정작 나의 심경을 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