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떠졌다. 밖은 여전히 어둠 속이다. 내면에서 밀려오는 의식의 물결이 잠결을 몰아내고 어둠까지 물리칠 기세다. 금세 맑아진 정신으로 팔다리를 쭉쭉 뻗어 각 마디마디에 기상을 알리고 핸드폰 화면을 터치하여 몇 시인지 확인한다. 심호흡을 끝으로 기상 준비를 마치고 이불을 걷어찬다. 잠에 대한 미련은 이미 걷어찬지 오래다. 아침 햇살이 나를 깨울 때 십 분만 더, 아니 일 분 만이라도... 애걸복걸하며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듯 몸의 중력을 천근만근으로 부풀린 게 엊그제 같았는데 기상이 이렇게 가벼워질 수가, 이제는 내가 새벽을 깨우고 있다.
시계의 초침 소리 따위가 귀청을 울릴 정도로 새벽녘엔 아무런 소리가 없다.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건,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째깍째깍... 천천히 그러나 어김없이 떨어진 시간들이 모여 어느새 도도한 세월의 흐름이 되었다는 거. 그래서 어쩌다 전날의 끝으로 연장되었던 새벽시간을 이젠 하루의 시작으로 맞이하게 되었다는 거. 제일 늦게 자는 것으로 그날의 열정을 표현했다면 이젠 제일 먼저 일어남으로 오늘에 기대를 걸어본다는 거. 풋~ 한낱 노화현상을 노회하게 표현하고 있구나. 그래도 새벽시간에 눈을 뜨면 밤새 쌓인 눈밭에 첫 발자국을 내는 것처럼 기분은 좋다.
그 선명한 발자국만큼이나 명료한 정신은 새벽시간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일단 고요함이 좋다. 일어나자마자 학교 가랴 출근하랴 정신없었던 지난날에는 전혀 맛볼 수 없었던 여유로움이 고요함을 배경으로 삶의 깊이를 들여다보게 한다. 3천 세대가 북적이는 아파트 단지에서 해 뜨면 시작되는 생활 소음은 한때 하루를 시작하는 배경음으로 적당하다 싶었는데 이제는 부산스럽기만 하다. 소음이 없는 지금, 비로소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과거가 튀어나와 원망의 하소연을 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현재가 있고 다짐하는 미래를 본다. 미래의 불안이 현재를 다그치기도 하고 과거를 그립게도 한다. 이 세 놈들이 합세하여 나를 들었다 놨다 하지만 결국은 내일의 장밋빛으로 마무리하니 하루의 시작이 가벼워진다.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텅 빈 방안에 음악을 채운다. 교회음악을 들으며 하루의 시작에 경건함을 보탠다. 성당으로 옮겼어도 수십 년 동안 듣고 불렀던 익숙함엔 커피만큼이나 중독성이 강하다. 철학 위에 신학이라고 이 시간만큼은 즐겨 듣는 클래식도 뒷전이다. 나에겐 시간대에 따라 듣고 싶은 음악의 장르가 확연히 달라진다. 새벽엔 찬송, 오전엔 클래식, 낮엔 가요, 저녁땐 흘러간 팝이나 세미클래식, 밤엔 다시 클래식, 비 오면 가요... 수천 년 전 신과 호흡하고 수백 년 전 선인들과 소통하며 현재의 유행도 즐긴다. 음악을 통해 하루의 시간대를, 인류사를 한번 훑고 지나가듯 흘려보낸다고 하면 과장이겠지. 어느새 클래식으로 바통이 건네지면서 사위는 밝아진다.
꿀잠에 밀려난 새벽의 정취를 이제야 맛보다니 나이든다고 다 손해 보는 것은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