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고돈쓰고 Jun 06. 2021

옆집 강아지

오늘도 남자는 아침 일찍 잠이 깼다. 어젯밤 일찍 취침해서도 아니고 나이 들어 새벽잠이 없어서도 아니다. 자명종의 따가운 소리에 깬 것도 아니고 일찍 회사에 출근해야 되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오늘은 토요일이니까.


'어우, 어우웅~~~'


바로 이 소리, 옆집 강아지가 울부짖는 소리 때문에 깬 것이다. 늑대도 아니고 개한테 이런 울음이 가능할까, 하긴 개의 조상이 늑대이니 가능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기가 무슨 들판도 아니고 다닥다닥 붙은 소형 아파트에서 개소리는 정말 '개판'을 만들고도 남았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1인 가구가 많은 편이라 조용했었는데 그것마저 외로웠는지 옆집 여자는 강아지를 입양했나 보다. 문제는 그 여자가 출근하고 집이 비었을 때다. 아직 어미 품이 그리운 강아지가 스트레스를 받는지 온종일 짖어대는 것이다. 남자는 ‘어휴, 오늘은 정말...’ 그냥 못 넘어가겠다 싶었다. 하지만 개가 짖는 것을 보니 여자는 벌써 나갔을 게다.


개가 수시로 짓어댑니다

너무 시끄럽습니다

조용히 좀 삽시다!!

                        -501호-


남자는 민원투의 쪽지를 써서 옆집 현관문에 붙여놨다. 일단 말보다는 글로 호소하려 했다. 팬이 검보다 강해서라기보단 신사적일 것 같아서다. 그 대신 기다림이 필요하다. 여자가 쪽지를 보고 고민하고 대책을 세워 아파트가 조용해질 때에야 비로소 여자의 대답을 들은 것이 되니까. 남자는 쪽지에 기대를 걸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외출했다. 주말을 즐기고 남자는 밤늦은 시각이 돼서야 집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앞에 다다른 순간 현관문에 종이쪽지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옆집 여자가 붙여 놓은 것인데 어두웠지만 내용은 대충 알아볼 수 있었다.


쪽지 보는 즉시

우리 집으로 좀 오시겠어요?

                         -502호-


12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간이라 남자는 망설였다. 이 시간에 혼자 사는 여자 집에 들어간다는 것이 실례고 부담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그놈의 개새끼' 때문에 잠을 못 자는 생존의 문제라 생각하니 한 번은 부딪혀야 할 상황이라 판단했다. 친구들과 마신 술로 아직 취기는 남았지만 남자는 심호흡 한 번하고 옆집 초인종을 눌렀다.


역시 개가 먼저 짖어댔다. '저놈의 개새끼' 남자는 욕부터 나오는 걸 꾹 참고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아무런 기척도 없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샤워하는 중인가?’ 술기운이 혼자 사는 여자의 침묵을 에로틱하게 만들었다. 마치 자신이 밤늦게 여친의 집을 찾아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상상에 몇 분의 시간은 흘렀고 그 사이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눌렀지만 여전히 개만 짖어댈 뿐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그제서야 남자는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쪽지엔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써놓고...' 남자는 짜증이 났다. 거기엔 강아지 문제뿐만이 아닌 어떤 기대도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하루는 끝이 났다. 다행히 그날 밤 개는 짖지 않았다.


다음날 남자는 늦잠을 잘 수 있었다. 일요일이기도 하였지만 웬일인지 옆집 개가 잠잠해서였다. 덕분에 개운하고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하지만 어제 옆집 여자를 만나지 못한 것이 떠올라 찜찜했다.


그때였다.


초인종이 울리면서 동시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 것은. 옆집 여자? 내심 반가운 마음에 커피포트에 물이 끓는 것도 놔둔 채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밖엔 여자 아닌 두 명의 건장한 사내가 서있는 게 아닌가. 그들은 다짜고짜로 신발을 신은 채 들어왔다. 그중 까까머리를 한 땅딸보가 대뜸 하는 말이 옆집 여자가 목 졸려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형사인 듯한 그는 남자를 용의자로 지목하는 분위기였다. 바로 어제 남자가 써서 붙인 쪽지가 물증이 되어 까까머리의 손에 쥐여있었다. 게다가 아직 버리지 않고 식탁 위에 있는, 자기 집에 오라고 쓴 여자의 쪽지도 그의 눈에 띄었다. 까까머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두 장의 쪽지를 남자에게 들이댔다. 층간 소음으로 다투다 순간 격분하여 칼로 찌르는 세태가 아닌가. 층간소음이나 측간소음이나. 남자는 어이가 없었다. 이건 누명이라 해도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합리적 의심이 드는 상황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커피 한 잔의 여유와 휴식이 예고됐던 집안이 순식간에 긴장과 의심으로 가득 찼다.


주고받은 두 장의 쪽지와 초인종에 묻은 남자의 지문 그리고 지난밤 남자가 엘리베이터 CCTV에 찍혔을 때와 여자가 살해된 시간대의 일치는 누명의 그물을 촘촘히 했다. 그가 의뢰한 변호사도 정황과 물증이 확실하기에 혐의를 인정하고 우발적 범행임을 주장하여 감형 받는 쪽으로 가자고 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확신하는 이는 남자 자신뿐이었다. 아니 또 있다. 옆집 강아지.


강아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현장에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말 못 하는 개를 어찌할 것인가. 남자는 어제까지 ‘웬수’로 여겼던 강아지에게 강한 유대감을 느꼈다. 갑자기 주인 잃은 강아지의 거처가 궁금했다. 사람은 아니지만 유일한 목격자(?)이기에 남자는 강아지의 확보가 필요할 듯싶었다. 말을 할 수 없는 개라면 그 자체가 물증이 될 수는 없을까? 유치장에서 남자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남자는 접견 온 변호사에게 대충 정황을 이야기하고 강아지의 소재를 파악해달라고 부탁했다. 변호사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으나 의뢰인의 부탁이니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가 국선이었다면 강아지를 증인으로 세울 거냐는 핀잔의 말을 내뱉었을 것이다. 하긴 남자는 강아지를 찾아봤자 별다른 도리가 없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래도 유일한 증인(거?)이기에 어쩌면 단서를 찾을 수도 있다는 희망만은 버릴 수 없었다.


다음날 변호사는 강아지를 찾아서 데리고 왔다. 남자 앞에 놓더니, 이젠 됐냐라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강아지는 넓적한 귀가 특징인 비글 품종으로 한두 살쯤 되었을까,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다. 남자를 처음 봤는데도 주인 대하듯 마냥 꼬리치며 반기고만 있다. 남자는 술 취한 주인을 화재 속에서 구하다 죽은 진돗개라든지 수백리 떨어진 먼 곳에서 집을 찾아 돌아온 풍산견 같은 특별한 능력을 바랐었나. 자신이 이 철부지 개에게 뭘 기대한 건가, 실망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결정적 물증이 있을까 넓적한 귀를 들춰보기도 하고 현장의 흔적이 상처로 남아 있나 몸통 구석구석을 살펴보기도 하였다. 이런 남자를 측은한 모습으로 보기 시작한 변호사는 이제 그만 모든 걸 인정하고 감형 쪽으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퇴근시간에 맞춰 경비실로 강아지를 데려가야 한다고 했다.


"경비실로요?"

"네, 아파트 경비가 자기가 대신 맡아 기르기로 했다네요"






그날 경비는 순찰을 돌다 여자의 집 앞에 쪽지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평소 다른 세대에서도 여자의 개 짖는 소리에 항의하는 민원이 들어왔기에 자신이 이참에 중재해 보려고 초인종을 눌렀다. 마침 여자가 문을 열었다. 경비는 붙어 있던 쪽지를 보여주면서 강아지가 짖어 주변 민원이 많으니 조심 좀 해야겠다고 했다.


“아가씨가 직장에 가있는 동안 내가 강아지를 맡아 줄까요? 혼자 경비실에 있기가 좀 지루하기도 하구”

“어머, 정말요? 안 그래도 그게 걱정이었는데 그렇다면 정말 고맙지요. 그럼 당장 오늘부터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가 지금 막 나가야 해서요.”


여자에게서 나는 향긋한 샴푸향이 곧 나갈 채비 중임을 풍겼다. 잠시 후 강아지는 경비실에 맡겨졌고 유독 개를 좋아하는 듯한 경비는 자신이 먹고 있던 새우깡을 강아지 입에 물려주며 친해지려고 했다.


늦은 밤이 되어 여자는 집에 돌아왔다. 그녀는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며 경비실을 기웃거렸다. 마침 경비는 순찰 중인지 보이지 않고 강아지도 없었다. 산책도 시킬 겸 강아지를 데리고 순찰 나갔나 했다. 그녀는 가방에서 포스트잇을 꺼내 몇 자 끄적거린 뒤 경비실 유리창에 붙였다. 고맙다는 표시로 경비에게 줄 아이스크림도 샀기에 녹을까 봐 쪽지만 남기고 그냥 집으로 올라갔다. 여름인지라 빨리 샤워도 하고 싶었다. 아침부터 과자를 즐겨 먹는 경비 아저씨를 보고 아이스크림도 좋아할 것 같았고 그런 초딩스런 입맛이 때묻지 않은 인성의 소유자로 여겨져 자신의 강아지도 잘 돌봐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앞에 다다른 여자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번호키를 눌렀다.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졌다. 경비는 가슴이 벌렁거리고 손이 떨렸다. 그제야 아침의 그 샴푸향이 하루 종일 자신의 코끝에서 떠나질 않았음을 깨달았다. 좀 전에 순찰을 마치고... 경비실에 붙은 쪽지를 보았고... 강아지를 안은 채 엘리베이터를 탔고... 502호 벨을 눌렀고... 그리고 핫팬츠 차림의 여자가 미소 짓는 얼굴로 문을 열어 주었는데... 경비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둘씩 기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중 강력히 떠오른 건, 문을 열어준 그때였다. 아침에 맡은 이후로 하루 종일 자신을 점령했던 그 샴푸향이 다시 강렬함으로 코끝을 스쳤던 순간, 그것이 화근이 돼버린 것이다. 경비가 현관문 안쪽으로 한 발짝 들어서자 여자는 강아지를 안으려 했고, 경비는 여자를 안으려 했다. 샴푸향은 경비에게 악마의 유혹으로 다가와 욕정을 분출하게 하였고 그 즉시 엄습한 후회와 두려움은 악마의 손아귀가 되어 그만 여자의 비명을 잠재워 버렸다. 모든 것은 찰나였지만 천지가 진동하는 순간이었다.


경비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난잡한 현장이 눈에 거슬렸다. 머리카락, 체모, 체액 등 현장에 증거물이 될만한 모든 것을 청소기로 훑고 물티슈로 닦기 시작했다. 자기딴에는 증거인멸이라는 아날로그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는 차츰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청소기통 세척을 마지막으로 모든 처리가 끝나자 그제야 강아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시리 강아지는 아까부터 경비만 쳐다볼 뿐 침묵하였다. 하루 동안 같이 놀아준 게 주효했을 것이다. 경비는 강아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설마 네놈이 말해봤자 짖는 것뿐이겠지. 그래 넌 목격자가 아니야, 나랑 공범이 되는 거다, 흐흐.” 경비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었다. 현장을 빠져나가기 전 경비는 문득 샴푸향이 궁금했다. 욕실로 들어가 다짜고짜 샴푸 뚜껑에 코를 들이댔다. 흐음~ 만족한 듯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흡사 약쟁이가 주사기를 팔뚝에 꽂는 모습이다. 용기를 보니 시트러스 계열의 향기로 여전히 상큼했다.


"제기랄... 이놈의 냄새가 뭐라고..."


현관물을 열고 나가려는데 경비는 갑자기 쪽지 두 장이 생각났다. 그는 그 쪽지들을 읽어보며 골똘히 생각했다. 경비는 뭔가를 떠올린 듯 고개를 끄떡였다. 아침에 떼어 놓은 남자의 항의성 쪽지는 여자의 식탁 위에 보이게끔 펴 놓고 경비실에 붙어 있던 여자의 쪽지는 남자가 사는 501호에 단단히 붙였다. 다행히 남자의 집은 불이 꺼져 있어 아직 귀가 전인 것 같았다. 아침에 남자가 외출하는 것을 본 경비는 그렇게 확신했다. 또박또박 눌러 쓴 쪽지의 글귀는 밤인데도 선명했다.


쪽지 보는 즉시

우리 집으로 좀 오시겠어요?

                         -502호-







작가의 이전글 새벽을 깨우리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