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바보들의 생애 첫 김장 도전기
일이 사라졌다.
프리랜서는 언제 어디서 일이 들어올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대기상태에 있다. 빈둥빈둥 놀다가 전화 한 통에 허둥지둥 여권만 챙겨 당장 내일 해외 출장을 가기도 한다. 확실한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프리랜서 생활이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바로,
프리랜서는 아사 아니면 과로사다.
일이 없어 죽겠다 싶을 때 일이 몰려오는 것이다. 그것도 쓰나미처럼.
그래서 이번에도 며칠 놀다 보면 어련히 일이 들어오겠지 생각했다. 일이 들어오면 바로 착수할 수 있도록 노트북도 거북이 등껍질처럼 메고 다녔다. 그런데 전화기는 울리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삼일... 일주일... 대기 상태가 일주일을 넘어가니 불안감이 (우리 지하방 곰팡이처럼)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무도 찾지 않는 2주가 지나자 결국 우려하던 사태가 발생했다. 나의 '걱정 인격'이 등장한 것이다. 다음 달에도 일이 없으면 어쩌지. 다다음달에도 일이 없으면 어쩌지. 걱정 인격은 상황을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서 받아들인다. 걱정 인격은 무한 자가증식을 거듭하며 나를 불면의 밤으로 이끈다. 불면의 밤에 나는 홀로 수많은 걱정 인격들과 싸움을 치른다.
걱정 인격과의 싸움은 항상 '모두가 잠든 야밤'에 이루어지고, 그 싸움에서 나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이 싸움을 피하려면 침대에 머리가 닿자마자 곯아떨어지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낮에 최대한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어야 했다.
어떤 재밌는 일을 하면서 몸을 혹사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 레이더망에 독서모임 멤버 Y 씨가 포착되었다. Y 씨는 얼마 전 우리 집에 직접 만든 라따뚜이를 들고 온 전력(?)이 있으며, 같이 요리를 해 먹자고 강한 의사를 표현한 바 있다. 그리고 Y 씨는 저녁에 일을 하기 때문에 평일 낮에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일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 우리 김장이나 해볼까요?
- (너무 흔쾌히) 좋아요. 수육도 만들어요.
에너지 발산이 필요했던 우리는 이렇게 쉽사리 김장을 결정하게 된다. 김장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손이 가장 많이 가는 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장을 하기로 한 '거삿날'이 밝았다. 결혼한 친구에게 김장 재료는 뭐가 필요한지 물어보았다. 김장은 조금만 할 때 훨씬 단가가 비싸다며 차라리 사 먹으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남는 에너지를 쓰기 위해 김장을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지만 (역시나) 이해받지 못했다. 인터넷으로도 김장 레시피를 검색해 보았는데 집집마다 재료나 방식이 달라서 어느 방식에 따를지 결정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김장에 대해 매우 무지한 상태로 슈퍼에 갔지만 그곳에서 귀인(=슈퍼 아주머니)을 만났다. 젊은 사람 둘이서 처음 김장을 한다고 했더니 순식간에 필요한 재료들을 계산대에 착착 올려놓으셨다. '이번에 처음으로 김장을 하는데 실패하면 평생 김치를 사 먹을 것이다'라고 했더니 열정적으로 배추 절이는 팁과 양념법을 알려주셨다.
슈퍼 아주머니 덕분에 '일은 벌였지만 수습하지 못하던' 우리는 자신감이 생겼다. '까짓 거 그냥 하면 될 것 같아요'를 외치며 사온 배추들을 우리 집 욕조에 풀어놓았다. 욕조에 물을 채우고 소금을 풀어 소금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반으로 갈라놓은 배추를 엎어놓고 위에 소금을 슬렁슬렁 뿌려주었다. 이제부터 12시간을 기다려야 했다(중간에 한 번 배추도 뒤집어 주어야 한다).
배추가 절여지는 12시간은 참으로 길었다. 괜스레 욕실에 들어와 배추가 잘 절여지고 있는지 뒤집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잠자기 전에도 배추를 한 번 눌러보고 잠이 들었다. 이런 기다림과 두근거림은 참 오랜만이었다.
다음날 아침, 눈뜨자마자 배추부터 확인했다. 아뿔싸. 배추가 전혀 절여져있지 않았다. 갓 사 왔던 상태처럼 단단하고 아삭거렸다. (엄마가 김장할 때 거의 도와준 적은 없었지만) 내 기억에 엄마가 절인 배추의 상태는 훨씬 흐물거렸던 것 같았다.
당황한 내가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뒷짐 지며 관망하던 동생이 보다 못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동생은 먼저 핸드폰으로 '배추 절이는 법'을 검색해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소금을 들고 와 배추 잎 사이사이에 켜켜이 소금을 뿌렸다. 참고로 대충대충 스타일인 나는 뭔가를 제대로 읽는 것을 매우 귀찮아한다. 특히 각종 설명서는 평생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곁눈질한 방법으로 배추 위에다가만 소금을 뿌렸더니 속까지 제대로 절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동생의 '정공법'은 통했다. 다시 두 시간여가 흐르자 배추가 눈에 띄게 숨이 죽어있었다. 배추를 한 번 샤워시키고 한 시간 정도 '대충' 물을 빼주었다(그리고 이 단계에서 '대충'은 결국 나중에 김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배추 물이 빠지는 동안 우리는 김장 양념을 만들기 시작했다. Y씨도 나와 같은 '대충대충파'였다. 우리는 김장 양념 재료를 전혀 계량하지 않은 채 오로지 눈대중으로만 양념을 만들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김장의 대가'같이 보였을 수도 있지만 사실 둘 다 김장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김장 바보'들이었다. 심지어 매우 용감하기까지 했다.
5분 만에 뚝딱 양념을 만들고 거실 테이블에 비닐을 깐 후 물 뺀 배추들을 올려놓았다. 비닐장갑 대신 수술용 장갑을 꼈더니 마치 배추를 수술시키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꽤나 엄숙한 모습으로 각자의 배추에 양념을 묻혀 나갔다. 이상하리만큼 평온하고 순조로운 광경에 '김장 별거 아니군'이라는 자만심이 고개를 드는 순간 문제가 발생했다. 배추를 1/3도 절이지 않았는 데 양념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몇 포기는 빨갛게 양념을 묻히다가 나중에는 겉절이 같은 모습이 되었다(갓김치도 담가야 했기 때문에 그날 결국 양념을 두 번이나 더 만들었다는 후문).
수육은 (동생이 관장했으므로) 매우 순조롭게 만들어졌다(내 동생은 장금이가 틀림없다). 우리는 마당에 테이블을 깔고 수육과 갓 만든 김치와 막걸리를 세팅했다. 양념이 부족하게 버무려진 김치는 '김치 샐러드'같은 느낌이었지만 어이없을 정도로 맛있었다. '그렇게 대충 만들었는데 왜 맛있지' 우리는 의아해했고, 모두가 힘들어하는 그 김장을 성공했다는 사실에 한껏 뿌듯해했다.
10리터짜리 김치통 네 개를 남긴 우리의 첫 김장은 그렇게 끝이 났고, 나는 일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김장 프롤로그
김치통을 열어보았더니 김치에서 물이 생겨 물김치가 되어있었다.
배춧물을 한 시간밖에 빼지 않았던 것이 패착이었다.
동생이 양념을 계량해서 만든 갓김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