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라이, 성은 또입니다
폭우에서 구한 길고양이 라이로 인해,
정자매 하우스는 시험에 들게 되는데...
오늘은 라이가 어떻게 정자매 하우스의 서열 1위로 올라가게 되는지,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난 글에서 소개했듯 라이는 2020년 7월 23일날 엄청난 폭우 속에서 우리에게 왔다. 인스타로 본 고양이와 실제 고양이는 달랐다. 아니 영 딴판이었다. (물론 라이는 특히나 유별났음을 인정한다)
DAY1 - DAY21 / ‘책장 라이’ 시절
라이는 기력을 차리자마자 집 안의 손이 닿지 않는 모든 틈새로 기어들었다. 가장 처음 라이가 선택한 곳은 거실 책장이었다. 꽂힌 책과 책장 사이의 좁은 공간에 몸을 비집고 들어가더니 여기에서 모든 의식주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책장 라이’ 일 때, 라이는 틈만 나면 창문 밖을 바라보며 애처롭게 울었다. 엄마 고양이에게 자신이 이곳에 감금되었으니 구해달라는 신호처럼 들렸다. 우리가 자려고 들어가면 그 강도는 더욱 심해졌다. 눈을 감으면 애옹애옹... 너무 피곤해서 다시 눈을 감으면 더 크게 애옹애옹... 나중에는 라이가 울지 않는데도 울음소리 환청이 들리는 상태에 이르렀다.
서편제 수준의 한 많은 라이의 애옹애옹은 일주일 내내 이어졌다. 하루는 동생이 강릉을 가서 나와 라이만 집에 남은 적이 있었다. 라이는 그날도 목이 쉴 정도로 처절하게 울어댔고, 난 진지하게 라이를 당장 밖으로 갖다 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렇게 나가고 싶으면 나가라 라이. (물론 그러지는 못했다)
불면의 일주일이 지나고, 라이는 너무 울어 목이 쉬었다. 애옹애옹에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저러다 영영 목소리를 잃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즈음 라이는 신기하게도 울음을 그쳤다. 엄마 찾기를 포기하고, 이곳에 감금된(?) 스스로의 처지를 받아들이는 단계에 이른 것일지도.
그때 즈음 ‘우리 집에 고양이가 있다’는 소식이 퍼졌고, 건물 입주민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라이를 구경하러 왔지만, 재빠르게 냉장고 뒤로 숨어버렸기에 대부분 실물 라이를 보는 데는 실패했다. 그 친구들에게는 긴 셀카봉을 냉장고 뒤로 집어넣어 찍은 (하악질하는) 영상으로서 만남을 대체해야만 했다.
DAY22 - DAY40 / ‘부엌 라이’ 시절
어느 날 아침, 부엌에 들어갔더니 싱크대 밑판이 떨어져 있었다. 역시나 범인은 라이였다. 밤새 처소를 책장에서 부엌 싱크대 밑으로 옮긴 것이었다. 어두운 싱크대 밑에 꽁꽁 숨은 라이를 보려고 가까이 가면, 라이는 온몸의 힘을 단전부터 끌어모아 하악질을 했다. 처음 삼주 동안은 너무 울어서 존재감이 엄청나더니, 이 기간은 지나치게 조용히 숨어 지내서 과연 고양이가 우리 집에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숨은 라이를 나오게 하고 싶어서 생각한 방법은 유튜브였다. 라이가 볼 수 있게 부엌 바닥에 노트북을 놓고 유튜브에서 ‘고양이가 좋아하는 물고기 영상’을 틀어놓았다. 그랬더니 바로 쏙 나와 모니터 속의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유튜브만 틀어주면 라이는 한 시간 이상 홀린 듯 모니터 앞에 앉아있었다. 애들한테 유튜브를 틀어주는 엄마들의 마음을 가슴 깊이 이해한 때이기도 했다.
싱크대 밑 생활이 슬슬 지겨워졌는지 라이는 우리가 방으로 들어간 틈을 타 도둑처럼 살금살금 집안을 돌아다녔다. 우리가 방에서 나오면 다시 하악질을 하며 싱크대 밑으로 줄행랑을 쳤기 때문에 우리는 거실에 카메라 삼각대를 설치해 라이가 뭘 하는지 엿보기 시작했다. (우리도 상당히 집요한 스타일)
카메라로 본 라이는 이중인격묘(?)였다. 화면 속의 라이는 화분의 흙을 파고, 꽃을 떨어뜨리며, 커튼을 물어뜯고, 오뚝이 장난감에 어퍼컷을 날렸다. 그러다 우리가 등장하면 다시 세상 가장 겁먹은 표정으로 싱크대 밑으로 숨어 들어갔다.
태생적으로 경계심이 많은 길고양이와 친해지려면 드물게 3주까지 걸리는 경우가 있다고 했지만, 우리는 한 달이 지나도록 라이의 반경 1미터에도 접근하지 못했다. 어쩌면 라이와는 계속해서 이렇게 서로 멀리서 쳐다만 보면서(또는 대치하면서) 지낼지도 모른다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DAY41 - DAY60 / ‘방문 앞 라이’ 시절
항상 멀찍이 떨어져 우리를 구경만 했던 라이가 이제 우리 방문 앞까지 다가왔다. 왠지 모를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방문 쪽을 보면, 라이가 역삼각형 얼굴을 반만 들이밀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라이는 그렇게 방문 앞, 침대 밑 순으로 조금씩 다가오더니 어느 날 이불을 덮고 누운 동생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기에 이르렀다! 세상에.
그리고 그게 편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때부터 잠은 계속해서 동생의 다리 사이에서 잤다. 내 침대로는 오지 않았다. (이 부분에서 상대적 박탈감이 엄청났다)
DAY61 - DAY90
(고급 참치캔과 사료와 화장실과 스크래쳐를 조공해가며) 라이와 지낸 지 세 달째에 접어들었다. 라이는 이제 내 다리 사이에서도 가끔씩 자고, 손에 올려놓은 사료를 (다소 망설이긴 하지만) 먹는 정도로 가까워졌다. 처음 데려온 날부터 품에 안겨오는 개냥이들과 비교하면 이게 무슨 친한 거냐 할 수도 있겠지만 지난 3개월간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성격적 결함이 많은 라이이지만, 그래도 무슨 사료든 가리지 않고 잘 먹고, 화장실을 기가 막히게 가리는 장점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창가에 라이가 오줌을 싸놓고, 한동안 울지 않던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내게 된다.
그랬다. 중성화의 시간이 와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