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최근에 친구가 방배동으로 이사를 갔다. 전에 살던 곳도 방배동과 그리 멀지 않은 서울이었다. 하지만, 전에 살던 곳은 친구가 십 년 넘게 머물던 동네여서 떠날 때 아쉬운 마음도 컸으리라 생각한다. 친구는 새 집으로 이사하고 이주 정도 지나자, 본격적으로 집들이를 시작했다. 집들이 전날, 친구는 카톡으로 '월남쌈 어때?'라고 물었다. 나는 바로, '오!! 월남쌈 좋지'라고 답했다. 나의 답에 '오!!'라는 감탄사가 붙은 이유가 있다. 월남쌈은 내가 좋아하고 추억이 많은 음식인데, 바쁘게 살다 보니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 감탄사는 친구가 내가 잊고 있던 음식을 다시 상기시켜준 것에 대한 반가움의 표현이었다. 오전보다 오후에 바쁜 나와 내 친구들은 오전 10시부터 친구네 집으로 들이닥쳤다. 빨리 점심을 먹고 헤어지자는 심산이었다. 새로 이사한 집을 잠시 구경하고 식탁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친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밀었다. 일상에 지친 삼십 대에게 아메리카노는 생명수와 같다는 걸 친구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커피를 마시고 있다 보니, 친구는 전날 사둔 월남쌈 재료를 냉장고에서 꺼내기 시작했다. 친구가 어찌나 손이 큰지, 냉장고에서 월남쌈 재료가 끝도 없이 나왔다. 그리고 월남쌈 후에 먹을 베트남 쌀국수 키트까지 구매해놨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월남쌈으로 옮겨갔다. 나는 친구에게 월남쌈이 내 추억의 음식이라고 했다. 보통, 월남쌈은 추억의 음식과 거리가 멀기에, 친구는 그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사실, 직업병이기도 한 것 같다. 친구는 잡지사 에디터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흥미로운 이야기라면 관심을 보인다.)
월남쌈이 내 추억의 음식이 된 건 미국 유학생활에서였다. 내가 미국에 지냈을 때, 한국에 돌아오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음식 때문이었다. 물론, 요즘엔 미국에도 한식당이 굉장히 많다. 그러나, 비싸기만 하지... 먹을 때마다 불만족스러웠다. 나는 한식이 생각나면 오히려 베트남 쌀국수를 먹으러 갔다. 미국 사람들에게 베트남 음식이 널리 알려져 있어서, 베트남 레스토랑이 그 수도 많고, 맛도 있었다. 무엇보다 저렴했고 양이 많았다. 따뜻한 국물이 생각날 땐, 베트남 음식만 한 것이 없었다. 한식처럼 원조의 맛이 아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교군이 없어서 더욱 만족스러웠을 수도 있다. 쌀국수와 더불어 큰 만족을 주는 음식이 월남쌈이었다. 월남쌈을 직접 만들어먹었는데, 혼자 사는 자취생에게 월남쌈 먹는 날은 그동안 부족한 채소를 몽땅 섭취하는 날이었다. 월남쌈은 항상 나를 비롯한 한국인 친구 세명이 모여서 만들어먹었다. 항상 이 멤버였다. 다른 친구들에게 배타적이어서가 아니라, 월남쌈을 크게 만들어 손으로 싸 먹으려면 허물없는 친구들이 필요했다. 이 친구들 앞에서는 손으로 음식을 만지고 입을 크게 벌려도 그리 창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월남쌈을 함께 요리하기엔 4명이 딱 적합했다. 4명보다 적으면 일손이 부족했고, 4명보다 많으면 정신만 없지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여러모로 이 네 명이 최정예 멤버였다. 우리는 이 시간을 매우 즐겼기 때문에, 모이기만 하면 월남쌈을 해 먹었다. 정말 다른 음식을 요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도 여러 번 해 먹다 보니, 누구는 소스를 만들고... 누구는 채소를 썰고... 누구는 고기를 굽고 새우를 데치고... 누구는 과일을 손질하고 가 정해졌다. 월남쌈은 라이스페이퍼에 넣을 재료만 준비하면 되기에, 요리라 할 것이 별로 없는데도 매번 맛이 조금씩 달랐다. 나는 채소를 써는 일을 맡았는데, 그 채소의 굵기를 어떻게 써냐에 따라 맛이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았다. 모든 재료를 균등한 크기로 잘 썰었던 날일수록 맛이 좋았던 것 같다. 요리의 기본기는 칼질이 아니겠는가... 이 기본기가 아주 간단한 요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아주 연세가 많으신 분이 아니라면 짧게는 한 달, 길면 몇 년... 피아노 학원을 다녀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피아노 학원 이야기가 나오면 으레 선생님한테 자로 손등을 맞은 이야기, 볼펜으로 맞은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뒤이어 체르니를 몇 번까지 쳤는지, 하농 연습이 얼마나 지겨웠는지를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들이 체르니를 자신이 얼마나 피아노를 잘 치는지에 대한 기준으로 여긴다. 그래서인지, 학부모님들은 빨리 체르니 진도를 빼 달라고 재촉하기도 한다. 심지어, 친구들과 비교까지 한다. 너무 안타까운 현실이다. 오랫동안 피아노를 공부해온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솔직히 어린 학생들에게 체르니 30번은 너무 어렵다. 특별한 재능을 가진 학생이 아니라면 빠르게 진도를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체르니와 하농 연습하기를 포기하고 있다. 이런 지겹고 어려운 걸 계속 붙들고 있느니, 치고 싶은 곡만 빨리 배우자 주의이다. 물론, 나쁜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체르니와 하농으로 테크닉의 기본기를 잘 닦지 않으면 매번 원하는 곡을 완성할 때 체르니와 하농을 연습하는 것 이상의 시간을 들여야 한다. 한편으론, 비효율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칼질을 잘하지도 못하면서 여러 가지 요리를 시도해보는 것과 같다. 삐뚤빼뚤하게 썰린 재료로 만든 그 요리의 맛이 어떻겠는가! 물론, 우리나라 피아노 교육에 안타까운 점도 많다. 우리나라 피아노 교본은 출판사 자체 제작보다 어디서 베껴서 짜집기 한 교본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치고 싶다고 가져온 악보는 원작을 아주 쉽게 축소하다 보니, 편곡이 엉성하기 그지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곡이 학생들이 음악을 좋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더 나은 대안을 가지고 있다. 클래식 작곡가들은 피아노 교본과 어린이를 위한 곡을 꽤 많이 작곡했다. 우리는 체르니 대신 바르톡의 미크로코스모스를 연습할 수도 있고, 하농 대신 장피쉬나의 교본을 시도해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음악성을 위해 슈만의 '어린이 정경'이나 드뷔시의 피아노 모음곡 '어린이의 세계'를 연습해볼 수 있다. 프로 연주자들도 이 곡을 연주할 만큼 음악적인 완성도 측면에서도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다. 음악으로 수백 년 동안 이름을 남긴 위인들이, 여러분을 위해 이렇게 많은 작품을 남겨놓았다. 이들의 작품을 연주하며 기본기를 잘 닦다 보면, 이 작품들이 우리를 한 차원 높은 음악의 세계로 이끌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