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되어야, 세월이 흘러야 좋아지는 것들....
‘먹고 자고 기도하고…’라는 줄리아 로버츠가 주인공인 영화가 있다. 우리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한데, 정작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 제목만큼은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에게 먹고 자고는 가장 훌륭한 여가 생활이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이 원초적인 취미생활에서 벗어나 다양한 취미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흘러서도 여전히 먹고, 자고에 머물렀다. (나중에 찾아보고 알았다. 영화 제목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고'이다. 먹고 자고가 얼마나 중요했으면 영화제목까지 잘못 기억할까.....). 다만, 먹는 것에서 좀 변화가 생겼다. 나는 이십대 중반까지 맥주와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맥주는 그냥 친구들 장단에 맞춰서 먹는 정도였고, 배만 부르지 뭐가 좋은지 알 수 없었다. 그 배부름의 불쾌함과 화장실 가야하는 귀찮음 때문에 그때의 나는 소주파에 가까웠다.
커피는 대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2009년에 접했다. 그때 우리나라에 카페 문화가 번지기 시작할 때였는데, 처음엔 라떼,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그 이름조차 생소했다. 그 이름만큼이나 맛도 생소했는데, 그 당시에 유행했던 카라멜 마끼아또나 라떼 정도 달달한 맛으로 먹어줄만 했다. 그런 내가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었던 커피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아메리카노였다. 당시 나는 아메리카노를 '독약'이라고 불렀다. 어찌나 쓰고 맛이 없던지…..당시엔 사람들이 왜 이 맛없는 것을 마시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카페에서 친구가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그 독약같은걸 왜 마시냐며 구박한 적도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십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난 맥주와 커피의 맛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당시엔 내가 미국유학생활을 하면서 부모님과 떨어져 처음으로 혼자 살던 시기이다. 부모님이 힘들게 돈을 버신다는 건 알았지만 꽤 부족함 없이 자랐기에...카드를 긁으면 돈이 나오는 것으로 알던 철없는 시절에서 막 벗어난 때 였다. 아무리 공부하고 일해도 월 말에는 생활비를 걱정해야하는 처지였다. 너무 힘들어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하교길에 눈물을 삼키며 죄없는 엄마에게 전화해 막무가내로 따지고 싶던 시절이다. 당시 나의 생활을 조금 적어보자면, 학교에서 연습을 마치고 돌아오면(내 전공은 피아노이다.) 저녁 11시 반 정도 되었다. 내 일과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집에와서 씻고 머리를 말리며 내일 가져갈 도시락을 싸야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있을 퀴즈를 준비해야만 했다. 그러고 나면 보통 새벽 2-3시가 되는데, 새벽 7시에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해야했으니 항상 정신이 몽롱했다. 당시 나의 미국인 룸메이트는 매일 아침마다 원두를 갈아서 신선한 커피를 내려마시곤 했는데, 그 고소한 커피향기가 1층 부엌과 거실을 가득 매웠다. 지친 몸을 이끌고 2층 방에서 1층으로 내려오면 그 향기를 자연스럽게 맡을 수 있었는데, 그 향을 맡으면 행복한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메리카노의 맛보다 향에 먼저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룸메이트가 내린 커피향에만 취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아메리카노를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은 아이스부터였다. 처음엔 아주 달달한, 너무 달아서 머리가 아플지경인 그런 쿠키와 함께 곁들였다. 전과 달리 독약같던 그 맛이 쿠키와 제법 어울리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커피, 아메리카노의 쓰디쓴 맛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마, 당시 내 생활이 쓰디썼던 것도 커피를 좋아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렇게 평일엔 아메리카노와 친해지고 있었다면 주말엔 맥주와 점점 친해지고 있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금요일 저녁이 되면 홈파티를 벌였다. 첫 학기엔 정말 매주 금요일 저녁에 친구네 집을 돌아다니며 파티를 했던 것 같다. 미국 대도시에는 한인마트가 많기 때문에 소주를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시골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내 외국인 친구들은 소주를 낯설어했다. 다국적을 가진 우리들이 공통으로 접한 술이 맥주인데, 그중에 나와 내 친구들은 ‘앵그리 오차드’란 맥주를 즐겼다. 이 맥주는 달달한 과일향 맛이 나는 술인데 나는 사과 맛을 제일 많이 마셨던 것 같다. 나중엔 나 뿐만 아니라 친구들 모두 바빠져서 홈파티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때 일주일에 한 번씩 마시던 맥주가 습관이 되서, 나는 집에서 혼맥을 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에 맥북으로 한국 예능을 보며 혼맥을 하던 시간이 나에겐 힐링타임이었다.
이 때에 나는 생활도 어려웠지만 음악가로서도 큰 슬럼프가 왔던 때이다. 열심히 하지만 뭔가 아니라는 생각만 가득할 때였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됐는지 몰라서 더욱 답답했다. 당시에 나는 슈만의 크라이슬러리아나Op.19를 배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슬럼프가 온 이유는 이 슈만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슈만의 작품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학시절 나의 선생님은 이 곡을 연습하기를 강력하게 몰아부치셨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아마 선생님은 슈만이 나에게 큰 도전이 되리란 걸 알고 계셨을 것이다. 이 곡은 아무리 연습해도 늘질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슈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인것 같았다. 그렇다면 더 좋은 연주자가 되기위해 나는 이 작곡가를 이해해야만 하고 이 한계를 넘어야 한다는 오기가 생겼다. 하지만 힘을 쓸수록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있는 법이다. 이 경우가 그랬다.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이 작곡가의 작품을 1년 이상 들고 있었다. 점점 지쳐갔다. 그렇게 졸업할 때가 다가왔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졸업학기가 되면 Comprehensive Exam을 본다. 일주일 안에 3명의 교수님께 받은 3가지 주제를 가지고, 각 주제막다 20페이지 정도의 소논문을 제출하는 것이다. 이즈음에 학생들은 도서관이나 집에서 칩거하며 글만 쓴다. 가끔 친구들이 밥도 못먹고 논문을 쓰고있을 불쌍한 친구를 위해 집으로 밥을 싸오기도 한다. 나도 당연히 이 과정을 거쳤는데, 한 성악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주제가 슈만의 가곡 '여인의 사랑과 생애'의 가사와 피아노반주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써오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슈만때문에 고생했는데 또 슈만이었다. 슈만의 가곡은 독일가곡이다. 독일어에 능통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 가사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독일가곡을 어려워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노래는 선율과 가사의 결합이다. 가사를 이해하지 못한채로 그 노래를 좋아하는 일은 결코 쉽지않다. 이해할 수 없는 슈만의 가곡을 정신없이 듣고 막무가내로 읽고 힘들게 썼다. 나는 다행히 시험에 통과했고 졸업했기 때문에 더 이상 슈만을 보지 않아도 됐다.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렇게 슈만이랑은 더이상 씨름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한두어달의 시간이 흐르고 친구랑 시카고에 놀러갔다. 한 음반사에 들렀는데 거기서 슈만의 가곡 '여인의 사랑과 생애'의 1번 곡 '그 남자를 본 이후로'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그 음악이 반가운 친구처럼 느껴졌다. 가사가 내 마음에 속속 박혔다. 뭐 엄청 감동적인 순간은 아니었고, 친숙하게 느껴지고 흥얼거리게 됐다는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집에 돌아와서 슈만의 가곡이 다시 듣고 싶어졌다. 그렇게 한동안 슈만의 가곡을 들었다. 금사빠처럼 갑자기 슈만에 빠졌다. 가랑비에 옷 젖는 다는 속담을 여기서 실감했다. ‘여인의 사랑과 생애'를 듣다가, 슈만의 또 다른 가곡’시인의 사랑'으로 옮겨갔다. 슈만의 목소리를, 말을 점점 이해하고 있었다. 다시 연습실로 돌아와서 슈만 '크라이슬러리아나'의 가장 느린 2번 곡을 쳐보았다. 이전과 다른 음악이었다. 아마도 그 즈음부터 나는 슈만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 슈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이다. 불타는 사랑이 아닌 서서히 달아오르는 사랑이었나보다. 아메리카노와 맥주와 천천히 가까워질무렵 나는 그렇게 슈만과도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