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잎현수 Feb 12. 2021

16. '식물 라틴어' 탐구

이름 뒤에 숨어있는 식물 이야기




새로운 취미나 애정하는 대상이 생겼을 때, 그 전에는 알지 못했던 세상에 눈을 뜨는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그냥 지나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무의미했던 것들이 의미를 띠며 다가오는 순간을 저 역시 참 좋아합니다. 식물을 공부하면서도 그런 순간을 여럿 만나왔지만 그중에서도 한 순간을 꼽자면 바로 식물 라틴어에 눈을 뜨던 순간입니다.



식물을 옮겨 심거나 가지 치기를 하는 등 작업하기 전에 우선 어떤 관리가 요구되는 식물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 확인 작업에 가장 중요한 것이 정확한 이름을 아는 것이기에 식물의 이름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정확하게 애정을 주는 법]에서 다루기도 했지만 '학명'이라는, 조금은 어렵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 때문에 '식물 라틴어' 뒤에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가려지는 게 늘 아쉬웠습니다.



학명은 세계 어디에서든 통용 가능한  하나의 공식 이름의 필요성 때문에 만들어졌습니다. A라는 식물을 두고서 나라, 지역마다 각기 다르게 부르더라도 공식적으로는 A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름으로써 혼란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계 공용어이기 때문에 영어일 것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바로  학명이 라틴어로 쓰입니다. 1753 린네라는 학자가 처음 학명의 체계를 정립하였을 당시 공용어가 라틴어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저는 어느 나라에도 종속되지 않은 중립적 언어이기에 라틴어로 쓰인다는 풀이를  좋아합니다.



학명은 보통 [속명 종명] 이렇게 두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요즘 개화기인 동백나무(Camellia japonica)를 예로 들면 앞에 있는 '카멜리아'가 속명, '자포니카'가 종명입니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동백이의 가게 이름이 카멜리아인 이유입니다. 카멜리아는 동아시아 식물을 연구한 선교사 카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자포니카는 예상할 수 있듯 일본(Japan)의 라틴어 표기입니다. 보통 종명에 국가나 지역 이름이 붙으면 최초로 발견된 곳이거나 종주국, 자생지인 경우입니다. 이렇게 학명을 풀이하다 보면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레 알게 됩니다.



'식물 라틴어'로 알게 된 식물 이야기는 제가 의도한 공부의 효과라면 라틴어라는 언어 자체를 배우게 되는 건 덤으로 얻게 되는 즐거움입니다. 가령 '종의 성별은 속의 성별과 일치해야 한다'와 같은 라틴어 특성 같은 것. 학교에서 스페인어를 배워보신 적 있다면 세상 모든 것에 성별을 부여해 그 성별에 호응하는 동사나 관사를 붙이는 문법을 기억하실 텐데요, 학명이 라틴어 기반이기 때문에 두 단어로 이루어진 학명마저도 성별을 맞춰준다는 뜻입니다. 남성(-us), 여성(-a), 중성(-um) 등 명확히 라틴어 어미로 끝나는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앞서 예로 든 동백나무를 보면 두 단어가 모두 -a로 끝나 여성임을, 남천(Nandina domestica), 마삭줄(Trachelospermum asiaticum), 구골나무(Osmanthus heterophyllus) 등도 속에 맞춰 종의 어미를 맞춰 썼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을 알고 나니 나무가 풍기는 이미지가 좀 다르게 느껴지지 않나요?



단어 풀이를 해나가다 보면 아는 영어 단어를 만나 의미 파악이 되는 것도 하나의 재미입니다. 큰 잎을 가진 나무의 학명을 보면 종명에 'macrophyllus'라는 단어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대형을 뜻하는 macro와 잎을 뜻하는 phyllus를 붙인 것입니다. 같은 의미를 가리킬 때 카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grande와 잎을 뜻하는 folius를 합쳐서 grandifolius를 붙일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수국(Hydrangea macrophylla)이 있습니다. 합쳐 놓아 어려워 보이지만 이렇게 아는 단어부터 보이기 시작해 조금씩 뜯어보다 보면 암호 같던 라틴어가 뜻을 품은 말로 다가옵니다.



잎이나 꽃이 크다, 작다, 뾰족하다, 둥글다, 갈라졌다 등 생김새의 특징을 담은 종명이 많은 편이라 잎을 의미하는 접미사(-folius, -folia, -folium, -phyllus), 꽃을 의미하는 접미사(-anthus, -anthemus, -florus)는 기억해두시면 유용합니다. 위 접미사가 붙지 않고 단어 자체로 모습을 나타낼 때가 더 많은데 digitalis 손가락 모양의, emarginatus 끝이 갈라진, linearis 선형의, cordatus 심장형의, erectus 똑바로 선, aculeolatus 가시가 많은 등은 유사한 영어 단어가 있어 비교적 유추가 쉽습니다.



사실 이름을 파고들다 보면 정확한 의미 풀이가  되는 단어 태반이고 어떨  주객이 전도된 것처럼 작업 목적보다는 이름 자체에 매달리는  자신이 웃기기도, 진이 빠지기도 합니다. 어렵게 확인하고 풀이하게 될수록 어떤 쾌감까지 느껴집니다. 그래서인지 카렐 차페크의  <정원가의 열두 > 나온  장면을 보고는 제대로 찔려버려 웃지 않을  없었습니다.


"어머, 이 작은 보라색 꽃 정말 멋지네요." 아마추어 양반의 칭찬에 정원가는 살짝 마음이 상해서 대꾸한다. "이건 페트로칼리스 파이레나이카예요." 정원가는 이름에 몹시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플라톤식으로 설명하자면, 이름이 없는 꽃은 형이상학적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꽃이다. 거기 있되 진정한 실재성은 결여되어 있다. 이름이 없는 꽃은 곧 잡초요, 라틴어 학명이 있는 꽃은 어떤 식으로든 존엄성을 인정받는다. 만약 당신의 화단에 쐐기풀이 자란다면 우르티카 디오이카라는 팻말을 한번 꽂아보라. 대하는 마음가짐이 바뀔 것이다.


정원가인 작가가 경험을 담아 우스꽝스럽게 묘사했지만, 이름에 대한 집착은 단어를 찾아 풀이하고, 정리하고, 외우는 여러 번의 과정이 만든 결과라는 걸 알기에 귀엽게 느껴지면서 동질감마저 들었습니다. 식물을 공부하면서는 많이 아는 것보단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되고 싶은 바람이 커집니다. 라틴어 공부에 좀 더 진도를 빼게 되면 이곳을 통해 ‘식물 라틴어’를 좀 더 공유해보겠습니다.






*브런치에서 기울임 서식을 허용하지 않아 적용하지 못했지만 모든 학명은 기울임 서식으로 표기합니다. 속명 첫자는 대문자로, 종명은 소문자로 적습니다.


*참고 도서 리뷰




매거진의 이전글 15. "선택해야 하지 않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