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지내고 있는 곳의 풍경에는 언제나 연한 녹색이 가득하다. 따뜻한 지역인지라 그 평온한 빛깔의 녹색은 겨울이 되어도 드문드문 그 모습을 지키고 있는데, 그 녹색이 힘을 잃고 풍경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는 때가 있다면 그건 바로 눈이 내리는 순간이다.
어디인들 눈 내리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은 곳은 없겠지만, 조금만 차를 몰고 산의 능선 어디쯤을 향하면 펼쳐지는 새하얀 설원은 토요 명화 속, 한 의사가 주인공인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이국적인 모습이다. 바로 그 순간이 좁은 창고 안에서 1년, 4계절 중에 봄, 여름, 가을까지 꼬박 3계절을 처박혀 구박을 받아오던 눈썰매의 대접이 융숭해지는 순간이다.
고작 플라스틱 판때기를 타고 눈 쌓인 산비탈을 내려오는 것이 뭐가 재밌냐고 하겠지만, 아무도 없는 설원 위에 기다란 선을 남기며 미끄러지는 눈썰매를 타는 기분은 아이고 어른이고 꽤나 즐겁다. 그렇게 곤돌라는커녕 계단도 없는 둔덕을 몇 번 오르락내리락하면 추울 틈도 없이 땀이 나지만, 점점 숨이 차고 어느새 콧물이 주르륵하고 코 끝에 맺히면 집에 갈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코코아나 한 잔 마시면 완벽한 하루일 테지만, 하얗고 깨끗한 눈밭은 언제나 자신만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사소하고도 자질구레한 욕망을 끌어당기는 존재다. 발자국과 썰매로 이미 잔뜩 흔적을 내놨건만 그날은 왜인지 차로 달리며 더 큰 흔적을 남기며 달려보고 싶었다.
돼지처럼 생겼다고 영화 '아기 돼지 베이브'에서 따와 아이가 '베이브'라고 이름을 부르는 우리 집 오래된 SUV는 시끄럽고 우당탕거리지만 어쩐지 산길에서만은 힘이 넘치는데, 그걸 믿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며 눈밭에 길고 아름다운 바퀴 자국을 내며 달리다가 결국 햄버거 패티 위에 들러붙은 가련한 치즈처럼 눈 위에 살포시 얹어져 꼼짝도 못 하고 갇히는 신세가 되버리고 말았다.
웃돈을 줘가며 부른 구조차를 기다리며 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맥없이 눈도 파내고, 밀어보고, 핸들도 이리저리 흔들어봤지만 으레 그렇듯 점점 더 수렁 속으로 빠졌고, 결국엔 구해주러 온 차도 함께 빠져 꽤 고초 끝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만류하고, 또 만류하던 아내에게 운전 실력을 믿으라며 큰소리를 잔뜩 치고 벌어진 일인지라 그 여파는 꽤 세서 한동안은 집에서 발자국 소리를 크게 내는 것만으로도 눈치를 봐야 했고, 아이에게는 고생이 아니라 즐거운 추억이었다며 가스라이팅을 시도했는데 그 성과가 영 신통치 않다.
지금에 와서 그날을 돌아보면 이미 차가 눈 밭에 빠질 징조 몇 개가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인데, 항상 이럴 때면 항상 하는 이야기는 같다.
"어? 어? 그러다 이럴 줄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