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kind of blu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페샬장 Jan 04. 2023

눈밭 위의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욕망


지금 지내고 있는 곳의 풍경에는 언제나 연한 녹색이 가득하다. 따뜻한 지역인지라 그 평온한 빛깔의 녹색은 겨울이 되어도 드문드문 그 모습을 지키고 있는데, 그 녹색이 힘을 잃고 풍경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는 때가 있다면 그건 바로 눈이 내리는 순간이다.


어디인들 눈 내리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은 곳은 없겠지만, 조금만 차를 몰고 산의 능선 어디쯤을 향하면 펼쳐지는 새하얀 설원은 토요 명화 속, 한 의사가 주인공인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이국적인 모습이다. 바로 그 순간이 좁은 창고 안에서 1년, 4계절 중에 봄, 여름, 가을까지 꼬박 3계절을 처박혀 구박을 받아오던 눈썰매의 대접이 융숭해지는 순간이다.


고작 플라스틱 판때기를 타고 눈 쌓인 산비탈을 내려오는 것이 뭐가 재밌냐고 하겠지만, 아무도 없는 설원 위에 기다란 선을 남기며 미끄러지는 눈썰매를 타는 기분은 아이고 어른이고 꽤나 즐겁다. 그렇게 곤돌라는커녕 계단도 없는 둔덕을 몇 번 오르락내리락하면 추울 틈도 없이 땀이 나지만, 점점 숨이 차고 어느새 콧물이 주르륵하고 코 끝에 맺히면 집에 갈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코코아나 한 잔 마시면 완벽한 하루일 테지만, 하얗고 깨끗한 눈밭은 언제나 자신만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사소하고도 자질구레한 욕망을 끌어당기는 존재다. 발자국과 썰매로 이미 잔뜩 흔적을 내놨건만 그날은 왜인지 차로 달리며 더 큰 흔적을 남기며 달려보고 싶었다.  


돼지처럼 생겼다고 영화 '아기 돼지 베이브'에서 따와 아이가 '베이브'라고 이름을 부르는 우리 집 오래된 SUV는 시끄럽고 우당탕거리지만 어쩐지 산길에서만은 힘이 넘치는데, 그걸 믿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며 눈밭에 길고 아름다운 바퀴 자국을 내며 달리다가 결국 햄버거 패티 위에 들러붙은 가련한 치즈처럼 눈 위에 살포시 얹어져 꼼짝도 못 하고 갇히는 신세가 되버리고 말았다.


웃돈을 줘가며 부른 구조차를 기다리며 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맥없이 눈도 파내고, 밀어보고, 핸들도 이리저리 흔들어봤지만 으레 그렇듯 점점 더 수렁 속으로 빠졌고, 결국엔 구해주러 온 차도 함께 빠져 꽤 고초 끝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만류하고, 또 만류하던 아내에게 운전 실력을 믿으라며 큰소리를 잔뜩 치고 벌어진 일인지라 그 여파는 꽤 세서 한동안은 집에서 발자국 소리를 크게 내는 것만으로도 눈치를 봐야 했고, 아이에게는 고생이 아니라 즐거운 추억이었다며 가스라이팅을 시도했는데 그 성과가 영 신통치 않다. 


지금에 와서 그날을 돌아보면 이미 차가 눈 밭에 빠질 징조 몇 개가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인데, 항상 이럴 때면 항상 하는 이야기는 같다. 


"어? 어? 그러다 이럴 줄 알았지."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고향? 너의 고향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