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막여우 May 09. 2024

시인의 감성이란.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올해 교내 교사독서모임 첫 책은 국어 선생님이 고른 시집이다. 굉장히 얇고 작은 책이다. '시요일'이라는 앱에 수록된 시를 엮은 책이라고 한다. 왼쪽 페이지에는 제목과 시인 이름만 적혀있고, 오른쪽 페이지에 시가 있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오른쪽이 먼저 보이고, 그래서 시를 읽는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리고 왼쪽 페이지를 보면 시 제목이 있다. 아 이걸 말하고자 한 거구나. 뒤늦게 깨닫는다.


조정래는 시가 소설보다 우월한 문학이라고 말한다. 부친이 시조 시인이고, 부인도 유명한 시인이며, 본인도 원래 시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가 우월한지는 모르겠지만 나같이 평범한 사람에게 너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이 책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총 네 개의 챕터로 나누어져 있다. 혼자 읽었을 때는 몰랐고 다른 선생님이 말씀하셔서 뒤늦게 깨달았다.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봄>

버려야 할 물건이 많다
집 앞은 이미 버려진 물건들로 가득하다

죽은 사람의 물건을 버리고 나면 보낼 수 있다
죽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를 내 다 버리고 오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것만 같다

한밤중 누군가 버리고 갔다
한밤중 누군가 다시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다

창밖 가로등 아래
밤새 부스럭거리는 소리

기일(忌日) (강성은)

많은 선생님이 좋아한 시이다.


죽은 사람의 물건을 버리고 나면 보낼 수 있다

죽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를 내 다 버리고 오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것만 같다



벽 뒤에 살았습니다   <여름>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이따금 한번씩은 비를 맞아야
동그랗게 휜 척추들을 깨우고, 주름을 펼 수 있다.
우산은 많은 날들을 집 안 구석에서 기다리며 보낸다
눈을 감고, 기다리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

벽에 매달린 우산은, 많은 비들을 기억한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등줄기, 온몸 구석구석 핥아주던
수많은 비의 혀들,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한다
벽에 매달려 온몸을 접은 채,
그 많은 비들을 추억하며

그러나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우산 (박연준)

최근에 박연준 시인 이름을 많이 들었는데 그의 시를 읽은 건 처음이다. 한 번도 우산을 기다림과 연결하여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우산은 오랜 시간 집 안 구석에서 비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시인 박준의 시를 찾아 읽었다.

세상 끝 등대  1

내가 연안(沿岸)을 좋아하는 것은 오래 품고 있는 속마음을 나에게조차 내어주지 않는 일과 비슷하다 비켜가면서 흘러들어오고 숨으면서 뜨여오던 그날 아침 손끝으로 먼 바다를 짚어가며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섬들의 이름을 말해주던 당신이 결국 너머를 너머로 만들었다

마침표도 없고 쉼표도 없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슬프고 아련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가을>


세 번째 챕터 첫 시의 제목은 '개 같은 가을이'이다.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가을 (함민복)

가을 챕터에 있는 또 다른 시. 짧지만, 가을밤 그리움 정서가 물씬 난다.



그리운 차마 그리운   <겨울>

마음이 술렁거리는 밤이었다
수수깡이 울고 있었다
문득, 몹쓸 짓처럼 사람이 그리워졌다
모가지 길게 빼고
설레발로 산을 내려간다
도처에 깔린 달빛 망사를 피해
오감만으로 지뢰밭 지난다
내 몸이지만 내 몸이 아닌 네 개의 발이여
방심하지 마라
눈앞에 있는 올가미가
눈 밖에 있는 올가미를 깨운다
먼 하늘 위에서 숨통을 조여오는
그믐달 눈꼴
언제나 몸에 달고 살던 위험이여
누군가 분명 지척에 있다
문득 몹쓸 짓처럼 한 사람이 그리워졌다
수수깡이 울고 있었다

고라니 (고영)

밤에 고라니 우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남자의 울부짖는 소리 다. 그 괴기스러운 소리를 이렇게 애틋하게 표현했구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세상 끝 등대 1'은 시는 박준의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에 수록된 마지막 시이다. 이 책의 제목은 자서전을 대필하며 생계를 잇고 살았던 무명작가 시절 자신의 삶을 표현한 것이다.


몇 년 전 교사 독서모임에서 처음으로 박준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박준 산문)'을 읽었다. 박준은 산문도 시처럼 쓴다. 그리고 그의 시는 꼭 산문 같다.


박준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한다. 학교 독서 행사에서 강연을 하는데 관중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본인의 시도 정말 어색하게 낭독했다.

그는 시인이라 그런지 여자친구라고 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 혹은 애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는 참 좋겠다. 남자친구가 시인이라. 늘 너에게 예쁜 말만 해 줄 거 아니냐'라고 말한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대답했다. '그건 맞지만, 나도 그에 부응하는 말을 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힘들다'라고. 박준은 여자친구의 사소한 말에도 쉬이 상처받고 지나가는 말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그때 말 끝을 왜 그렇게 올리면서 말을 한 거지?라고 곱씹어 생각하는 사람이다.

시인이란 누구나 겪는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섬세한 감각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사람인 것 같다.


학교에서 하는 행사에서 작가 개런티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학교에 강연 오는 작가님은 그 자체로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 만나는 것을 어색해 함에도 불구하고 바쁜 시간 중에 학생들에게 강연을 해 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훌륭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다. 유키즈에 나온 것도 봤는데 편집을 잘해서인지 유려한 말솜씨만 보이고 그의 어색함은 없었다.

박준 시인의 사인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

그날 박준에게 받은 사인이다. 글씨도 멋있다. 한 명 한 명 이름을 묻고 빈 종이에 그 이름을 연습 삼아 써본 다음 사인을 해 주셨다. 느리면서 섬세한 그의 감성과 함께 2019년 가을이 느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백 루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