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양평 여행 갔다가 양평군립미술관에 들렀다. 덥고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가까운 실내 공간으로 선택했다. 양평은 예술가가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계곡을 따라 즐비하게 놓인 카페 상당수 주인이 예술가이며 갤러리 카페를 겸하고 있었다. 양평군립미술관은 해마다 양평을 대표하는 작가를 선정하여 전시한다.
상설전시보다는 기획전 위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2024년 양평을 빛낸 작가전은 '민정기 아카이브 전 : 놓치지 못하는 풍경'이다.
양평군립미술관 아카이브는 개인 및 단체가 활동하며, 남기는 수많은 기록물 중 가치가 있는 것을 선별하여 보관하는 장소, 또는 그 기록물 자체를 이르는 용어이다. 이번 아카이브 전은 작가의 전 생애에 걸친 회화, 판화 작품과 함께 작가연구 기록물들을 미술관 전관에 전시하고 있었다.
민정기는 민중미술 화가로 알려져 있다. 나 역시 그렇게만 기억한다. 민중미술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함께 나타난 사회 변혁과 비판을 위한 미술 운동이다. 대중과 소통하며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 반면 순수 예술로의 발전은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민정기 작가는 민중 미술 화가 타이틀에 갇혀있는 것을 경계하며 계속해서 새로운 예술을 추구했다. 우리 사회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그리던 화가는 여전히 주변 환경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인물과 사건 중심에서 자연 풍경으로 그 범위가 넓어졌다. 작품 주제가 변한 계기 중 하나는 양평으로의 이주였다고 한다. 물론 우리 사회가 격동의 1980년대에 비해 많이 안정화되기도 했다.
민정기 인터뷰 놓치지 못하는 풍경을 그리기 위해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요즘은 인공위성사진도 많이 이용한다고 하셨다. 과거 작업 방식에 머물러 있지 않고 변화하는 시대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적응하는 태도가 존경스럽다.
큰 기대 없이 방문했는데 그림이 너무 좋아서 꽤 오래 머물렀다. 아이는 몇 번이고 작가 이름이 뭐였지? 이거 전부 이 작가가 그린거지? 반복해서 물어보았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작가 이름을 꼭 기억하고 싶다고 했다.
민정기 작가 작품은 시간순으로 4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 시기 : 도시와 역사를 담다 (~1986)
민중미술 시기이다. 대표작으로 '포옹', '세수'가 있다. 강렬한 원색을 사용하며 이발소 그림 같은 키치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포옹_1981_캔버스에 유채_112×145cm_개인 소장
풍요의 거리_1981_캔버스에 아크릴릭_162×260cm_아르코미술관 소장 판화도 몇 점 있었다. 민정기 작가는 도미에, 고야의 판화에서 '판화가 사회상을 다루는 방식'에 관심을 가지고 석판화와 에칭을 공부했다고 한다. 유채 작품으로만 알고 있었던 '세수' 판화도 있었다.
민정기 '세수'
민정기 '세수' 전시된 판화는 모두 'A.P.'였다. 판화는 회화와 달리 여러 장을 찍어낼 수 있기 때문에 에디션 넘버를 연필로 기록한다. A.P. 는 판매용이 아니라 작가 소장품이라는 뜻이다.
2 시기 : 양평 답사의 시작, 지도 같은 그림 (1987~2001)
양평으로 이주 이후 본격적으로 자연을 그리던 시기이다.
작가의 작업은 자료조사와 현장답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고지도와 장소의 역사를 담은 글을 바탕으로 '그리고자 하는 풍경'이 정해진 뒤, 현장에서 사진 촬영으로 이를 남기고 현장 혹은 촬영한 사진을 다시 살펴보며 스케치를 통해 캔버스에 담는 화면 구성을 치밀하게 이뤄낸다.
벽계구곡도1_1992_캔버스에 아크릴릭_200×336cm_작가 소장 우리의 고지도를 차용한 방식이 특색 있다.
3 시기 : 물길 따라 발길 끝에 (2002~2011)
그림의 크기가 더 거대해진다.
우리 섬 독도 별맞이_2002_캔버스에 유채_225×340cm_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파란 독도 그림이 정말 아름다웠다. 광각렌즈로 찍은 듯한 독도를 둘러싼 배경은 별자리가 있는 밤하늘 같기도 하고 동해의 망망대해 같기도 하다. 독도와 별을 연결시킨 이미지가 색다르다. 우리 섬 독도 별맞이.라는 제목도 어감이 참 예쁘다. 외롭고 아름다운 섬이 느껴진다.
하지만, 작품 주변의 콘센트와 지저분한 전선은 아쉽다.
자연에 몰두한 민정기 작가의 작품에서 데이비드 호크니의 최근 작품이 연상되었다. 호크니는 60~70년대에 캘리포니아 중상층의 삶, 특히 수영장 풍경을 담아내었고, 오늘날은 캘리포니아의 광활한 자연환경을 거대한 사이즈의 다시점 풍경화로 그리고 있다. 민정기 작가도 80년대 우리나라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그림을 그렸다면, 이후 자연 풍경을 담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다시점의 거대한 풍경화라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여러 개의 캔버스에 나누어 그리는 방식도.
데이비드 호크니
4 시기 : 다시 양평,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2012~현재)
작가는 37년 전 그렸던 양평 풍경화를 같은 장소에서 다시 그려서 변화된 모습을 새롭게 반영하고 있다.
벗고개_1992_캔버스에 유채_60×86cm_작가 소장 벗고개 2024_2024_61×90.3cm_캔버스에 유채_작가 소장
위는 과거에 그린 풍경, 아래는 최신작이다.
작가의 최근 그림 양식이다. 사실적인 풍경 같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가로 세로로 반복적으로 그은 추상적인 빗살선이 보인다.
1980년대에는 사회 비판에 주력했다면, 양평 이주 이후 순수한 자연을 그렸고, 최근 작품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유 몽유도원도_2016_캔버스에 유채_209.5×444cm_작가 소장 '유 몽유도원도' 작품 앞에서 한 동안 머물렀다. 몽유도원도와 현재 서울 모습이 함께 그려진 초현실적인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꿈속 비현실 공간과 실재 공간, 조선 초기와 현대 대한민국의 각기 다른 시대가 한 화면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린이 전시관람 프로그램 어린이용 전시관람 프로그램도 잘 되어 있다. 입구에서 브로셔를 챙겨서 퀴즈를 풀면서 다니면 더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다. 우리는 미술관을 떠나면서 알게 되어서 아이가 많이 아쉬워했다.
어린이 전시관람 프로그램
2024년 양평을 빛낸 작가전 '민정기 아카이브 전 : 놓치지 못하는 풍경'은 올해 8월 18일까지 전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