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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여우 Oct 18. 2024

모자의 나라 조선

2009년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이 인기를 끌면서, 해외에서 조선의 모자에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마존에서 갓이 매출 상위에 오른다거나 핼로윈 데이 분장도구로 갓이 사용된다는 등의 기사도 보였다.

모자의 나라 조선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조선의 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다양한 모자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많은 모자를 소개하고 있다.


책은 비교적 크고 두껍지만 도판이 많아 쉽고 재미있게, 빨리 읽을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품인 모자 사진, 신윤복을 비롯한 당대 풍속화 속 모자, 구한말을 여행한 외국인이 찍은 사진이나 그림 속 모자 등이 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엘리자베스 키스의 채색목판화가 많았다. 영국 화가인 엘리자베스 키스는 일본에 살고 있는 여동생을 방문했다가 동양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대로 극동지방에서 살게 되었다.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에 한국을 어려 번 방문하며 채색목판화로 작품을 제작했다. 그 시대 모습은 주로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는데, 키스의 작품에서 조선의 아름다운 색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모두 모자를 쓰고 있다.


왜 모자를 썼을까?

1900년 프랑스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장의 한국관 그림을 보면 화면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다양한 모자를 쓰고 있다. 갓, 정자관, 삿갓, 패랭이, 아얌 등등, 모자를 쓰지 않은 인물은 청국인 딱 한 명이다. 조선은 왜 그렇게 모자가 많았을까?


이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의 상투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의 모자는 상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둘째, 신체 부위 중에서도 특히 머리를 중요시하는 존두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유학적 선비 사상에서 비롯된 의관정제 의식이 철저하여 의복과 관모를 함께 갖추는데 정성을 다했다.

셋째, 500년 이상 지속된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왕조마다 고유한 문화가 있었고, 장기간에 걸친 문화의 지속성은 모자문화에도 강하게 작용했다.

넷째, 조선은 엄격한 신분 사회로 신분과 직업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부여하기 위해 모자를 이용했다.


민영환의 의관정제

1896년 민영환은 고종의 칙명으로 수행원과 함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9개국을 경유하여 50일 만에 도착했지만 사행의 목적이었던 황제의 대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대관식이 거행된 사원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모두들 모자를 벗어야 하는데, 사모관대를 해야 한다는 민영환의 고집 때문이었다. 사절단의 차석인 윤치호는 임금의 어명이니 대관식 동안만이라도 사모를 벗어야 한다고 요청했으나 민영환은 완강히 거부했다.


상투의 나라

연세대를 세운 언더우드의 부인이 쓴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견문록'의 원제는 '상투의 나라'였다. 상투는 한자어 상두에서 나온 말로 북두칠성을 가리킨다. 칠성 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머리에 북두칠성을 얹었다는 의미이다. 우리 조성은 칠성이 삼신 하느님이 있는 곳이라 믿었기에 상투는 곧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의 상징으로 여겼다. 고조선 이전 신석기, 청동기 문화에서부터 상투를 고정하는 옥고가 다량 출토된 것으로 보아 우리의 상투는 신석기시대부터 형성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옥고는 중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상투가 동이족의 고유한 머리 양식이기 때문이다.


갓, 조선 선비의 멋

갓을 만드는 일은 지극히 어렵다고 한다. 최소한 세 명이 분업하여 작업을 해야 가능하다. 양태를 엮는 양태장과 총모자를 엮는 총모자장, 입자 작업을 하는 입자장 세 사람이 각자 독립적인 분업으로 갓을 조립하여 하나의 갓을 완성한다. 각 공정을 익히는 데는 10여 년 이상이 소요되기 때문에 다른 공정의 기술을 익힐 시간과 여력이 없다.

실용주의에 집착하던 19세기 유럽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조선 선비들의 검은 갓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추위와 햇빛 또는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전혀 머리를 보호하지 못하는 갓은, 유럽인의 눈에는 실용성이 전혀 없는 비문명적이고 우스꽝스러운 물건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조선 선비들의 갓에 내포된 유교 윤리관과 신분 상징과 같은 갓의 사회적 기능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p 40)


모자로 인한 표현 

우리말에 '감투 썼다'는 표현은 벼슬길로 나가는 것을 말한다.


'아양을 떨다'는 말은 아얌이 변한 말이다. 아얌을 쓴 여인이 걸을 때마다 아얌의 앞, 뒤 술이 찰랑거리며 떨리는 것을 여인의 애교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아얌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갓은 머리를 덮는 모부인 대우와 햇빛을 가리는 챙인 양태로 이루어져 있다. 양태를 만들 때 인두로 곡선을 만드는데 이를 '트집 잡기'라고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트집을 잡는다'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 외 '감나무 밑에서 갓 쓰지 말고 외밭에서 신발 동이지 말라', '끈 떨어진 갓' 등 갓과 관련된 속담이 많다.


그 많던 조선의 모자는 왜 그렇게 빨리 사라졌을까?

조선의 모자가 빨리 사라진 것은 1895년 을미개혁에 시행한 단발령 때문이었을 것이다. 강압적인 단발령으로 목은 자르더라도 상투는 자르지 않겠다며 자결하는 사람도 있었고, 전국 각지에서 항의의병이 봉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상투를 자르고 보니 그 편리성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후 자발적으로 단발을 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상투가 없어지니 상투를 가리던 망건, 탕건, 갓이 빠르게 사라져 갔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모자의 나라였다. 한국의 3대 모자 회사 '영안모자', '유풍실업', '피앤지 코포레이션'이 그대로 세계 3대 모자 제조업체로 30년 이상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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