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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여우 Nov 05. 2024

서울, 광진 천년을 살다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풀어낸 서울, 광진 역사문화 기행

광진구 토박이며 광진구에서 역사문화 해설을 하고 있는 저자가 쓴 광진구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인근 지역까지 포괄한 역사 이야기라 광진구에 살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강남 사람은 아니지만 '강남의 탄생'이 정말 흥미진진했던 것처럼.


뒤표지에 이 책을 잘 요약해 두었다.

50년 가까이 서울, 광진에서 살아오고 있는 저자는 서울 광진구의 선사시대 지질부터 최근의 인물 모윤숙, 운암 김성숙 선생, 한국인 최초의 골퍼인 연덕춘 등의 생애는 물론, 중곡동 고분, 뚝섬 금동여래좌상, 아차산성, 건국대의 문화유산, 어린이대공원에 얽힌 이야기 등을 진솔하게 풀어낸다. 아울러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일제강점기 광진유적조사보고서를 원문과 함께 번역하여 수록하였다.
서울, 광진 천년을 살다

지질

광진구 역사 이야기는 무려 25억 년 전 지질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광진구 지층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시생대와 원성대에 형성된 편마암으로, 이후 바다 퇴적층이 쌓이고 1억 8천만 년 전 지각융기로 화강암이 편마암층을 뚫고 솟아오르면서 오늘날의 아차산이 탄생했다. 아차산의 독특한 풍경, 즉 왼쪽은 돌산이고 오른쪽은 흙산인 이유는 바로 이러한 복잡한 지질학적 역사 때문이다.


선사시대

신석기시대에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은 물이 풍부하고 농사를 지을 땅이 있으면서 홍수를 피할 수 있는 언덕이 있는 곳이었다. 광진구에서는 자양동 언덕, 구의 3동 옛 구정동 지역, 어린이대공원인 능동과 중곡동 능선, 광장동 언덕 등이 이런 조건을 갖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불상

금동불좌상. 5세기 전반 높이 4.9cm. 뚝섬 출토.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불상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뚝섬 출토 불상이다. 고구려, 백제, 중국 불상 중 어느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한반도에서 발견된 최초의 불교 유물이라는 점에서 한반도 불교의 시작점이 뚝섬 일대였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지명 이야기

마장동은 조선시대부터 말을 기르던 곳이다.


936년 태조 왕건이 귀순한 후백제 견훤왕에서 지금의 서울 지역을 봉지로 내리면서 양주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고려 시대에는 지금의 서울, 고양시, 의정부시, 구리시, 남양주시를 아울러 한강 이북지역을 통틀어 양주라고 불렀다.

양광도라는 지명도 나오는데, 이는 양주(한강 이북)와 광주(한강 이남)를 합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조선시대 수도가 개성에서 양주로 이전하면서 양주는 한양을 둘러싸는 지역의 통칭이 되었다.


양주 나루터이면 양진, 광주의 나루터이면 광진일까? 아니면 광주에 있어서 양주로 향하는 나루터여서 양진, 양주에 있어도 광주로 향하는 나루터면 광진. 정답은 저자도 모른다. 어느 쪽이 맞는 주장인지 궁금하다.


화양은 중국 주나라 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하고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중국 '화산의 남쪽 즉, 화양에서 말을 돌려보낸다'라는 '귀마우화산지양'은 오랜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기원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한자 양()의 의미는 산의 남쪽, 강의 북쪽을 말하며, 한양은 한강의 북쪽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광진

1741년(영조 17)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에 보이는 광진의 풍경

정선이 그린 광진이다. 천호대교 남단에서 강 건너 아차산을 바라본 풍경으로 워커힐 주변이다.


조선 시대 광진구는 왕실의 전유물이었다. 왕들은 이곳에서 말을 기르고 사냥터로 사용했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도 조선 왕실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해방 후 이왕가 재산의 국유화 논의가 촉발되면서 대규모 매각이 이루어졌다. 삼육대, 덕성여대 운현궁, 배재학당 등 유명한 기관들이 이 시기에 왕실 소유의 땅을 매입했다. 특히, 광진구 땅의  상당 부분(약 70~80%)이 과거 이왕가 소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창이 밝았느냐'로 유명한 시조를 지은 남구만도 광장동에 살았다. 그때 광진구는 소 치는 아이가 갈아야 했던 사래 긴 밭이 있던 곳이었을 것 같다.


네 개의 대학이 탄생한 서북학회회관

서북학회 회관. 현재 건국대학교 박물관 (출처: 광진구청)

르네상스 양식의 아름다운 서북학회 회관은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서북학회의 본산으로 시작하여, 이후 오산학교,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등 민족계 학교로 사용되었다.


 1941년 건국대학교 설립자인 유석창 박사가 회관을 인수하면서 건국대학교의 모태가 되었고, 1949년 정식으로 건국대학교가 설립되었다. 같은 시기, 신익회와 장형 등 독립운동가들은 이곳에서 국민대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하지만 신익회의 정치 노선 변경으로 인해 장형은 별도로 단국대학교를 설립했다.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까지 포함하면 건국대, 국민대, 단국대, 고려대 총 네 개의 대학이 탄생한 곳이다.


모윤숙과 낙랑클럽

광진구의 인물 이야기 중 가장 관심을 끌었던 인물은 모윤숙이었다. 이화 여전을 졸업한 시인이었던 모윤숙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파로 알려져 있으며,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과 결혼생활을 했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을 적극 지지하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기여했다.


모윤숙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하면, 1946년에 낙랑클럽을 설립한 것이다. 이화 여전 출신의 영어 능통한 고급 인텔리 여성 150여 명으로 구성된 낙랑클럽은 총재 김활란, 회장 모윤숙을 중심으로 미군정 장교들의 사교장 역할을 했다. 미국 CIC 보고서에서는 낙랑클럽을 '로비를 위한 고급 호스티스 단체'로 규정했다. '낙랑'이라는 이름은 낙랑공주처럼 고귀한 신분의 여성들만 입회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낙랑클럽'은 최근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 김활란의 친일행적을 비롯하여 이대 내에서도 서로 다른 의견이 대립해 온 지 오래되었다. 역사적 오명외면하기보다, 과거를 반성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을 할 때 더욱 신뢰받는 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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