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ite Privée par François Halard'
비가 보슬보슬 오던 지난 목요일 오후, '피크닉'의 새로운 전시 '비지트 프리베 | Visite Privée'를 보러 갔다. 봄비에 빛바랜 듯 흐릿해진 색감은 피크닉의 예전 전시 '사울레이터 | Saul Leiter'의 사진처럼 센티멘털한 걸음을 걷게 했고, 발끝에 살짝 튀는 빗방울은 거친 획을 그을 때 튀어 오르는 붓끝의 수채화 물감처럼 자유롭게 포물선을 그렸다. 피크닉은 서울에서 내가 사랑하는 공간 중 하나이다. 그래서 '국내여행'전을 제외하고는 모든 전시를 빠짐없이 보았다. 얼리버드티켓을 예매하고, 여유롭게 관람할 날짜를 정할까 했으나, 전시오프닝이 지나면 카페피크닉의 긴 테이블 위 아를/Arles에서 영감을 받은 꽃과 화병과 레몬 디스플레이가 치워질 거란 글의 읽고는 버스에 올라탔다. 비가 서서히 잦아들 때 즈음 전시장에 도착했는데, 로비에 bucket hat을 쓰고,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계신 인자한 인상의 프랑수아 알라르 / François Halard 작가님이 계셨다.
'오프닝에 맞춰 올 줄 알았으면 북사이닝도 예약할 걸'이란 후회가 들었으나, 크지 않은 한 공간에 멋진 작가님과 한 자리에 있는 행운을 그저 만끽하기로 했다. 멀찌감치 서서 바라본 '사람을 대하는 품격' 또한 그의 사진처럼 따사로운 분이셔서 더 설레었다. 로비에서 이번 전시의 Deputy Director, 조유리 님과 사진작가로도 활동하는 류준열 배우님을 지나치며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한 카페로 들어선다.
비지트 프리베 | Visite Privée는 프랑스어로 사적인 방문을 뜻한다. 동선의 시작에 있는 폴라로이드 사진이 마치 Enchanté!라고 말하는 초대장처럼 느껴졌다. 그의 시선에 따라 누군가의 사적인 공간 속에 스민 취향을 감상하는 동안 대학생 때 보았던 타인의 취향/Le goût des autres이란 프랑스 영화 타이틀을 떠올리게 된다.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 수많은 명사들의 선택과 삶의 방식이 프랑수아 알라르 작가님의 취향으로 걸러지고, 다시금 나의 주관이 담긴 선택과 집중으로 시간을 분배하여 고른 사진들은 깊이 있게 바라보게 된다.
쥐세페 판자 /Giuseppe Panza는 괴짜 컬렉터였다고 한다. "그는 방대한 공간 안에 소장품을 직접 배치했고, 역사적이고 건축적인 맥락 속에 인테리어와 작품이 하나로 어우러지면,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컬렉션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 이 사진을 보며 마음에 와닿았다. 묵직한 작은 다이닝 테이블 위에 신비로운 푸른빛 화병과 보랏빛 꽃, 벽에 걸린 모던한 흑단 데칼코마니 같은 Max Cole의 마주 본 같은 두 개의 페인팅과 클래식한 샹들리에가 조화로웠다. 일곱 개의 의자와 샹들리에의 5개의 전구가 좌우대칭을 깨며 시선에 리듬을 더한다.
쉰들러 하우스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출생한 미국 건축가 루돌프 마이클 쉰들러 / Rudolph Michael Schindler가 시공업자인 체이스 부부와 함께 거주할 목적으로 설계한 사무실 겸 집"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일리노이주 오크파크 스튜디오/Oak Park studio에서 일했던 쉰들러를 라이트는 1920년 홀리혹 하우스/Hollyhock House 프로젝트를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불러들이는데, 그 당시 쉰들러 하우스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따뜻한 목재 소재의 면과 선이 중첩되거나 분할되면서 다양하고 재미난 형태들이 생겨난다. 투박하면서도 간결한 콘크리트 벽체, 둥근 조명의 상단을 제외하고는 유일한 곡선을 그리는 부드러운 커튼, 감귤색의 페인트, 그리고 길고 가느다란 상단의 창을 통한 채광, 이런 소재의 조화 속에서 현대적인 미가 느껴진다.
이 여인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보고 찬탄을 했다. 우아한 곡선과 많은 스토리가 담긴 것 같은 마티에르/matière와 조각가의 터치가 매끈한 대리석의 조각들과는 달랐다. 알라르의 이 사진을 접한 후 신고전주의의 한 획을 그은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Antonio Canova라는 이탈리아 조각가가 궁금해졌다. 그는 네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재혼으로 떠난 후, 조각가 겸 석공인 할아버지 집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 회자되던 유명한 일화로, 어느 상원 의원이 주최한 만찬회에서 어린 안토니오 카노바가 작은 버터 덩어리로 훌륭한 사자상을 조각했는데, 이를 본 상원 의원이 카노바의 후원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토니오 카노바"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가 작은 버터로 만든 사자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뉴욕 42번가와 5th Avenue에 있는 도서관 앞에는 인내/Patience와 강인함/Fortitude이라 불리는 한 쌍의 대리석 사자상이 있다. 그 두 사자상을 참 좋아했었는데 카노바의 사자라면 왠지 더 온유하고 포근한 느낌일 것 같다.
가수 레니 크라비츠/ Lenny Kravitz의 파리 아파트에서 찍은 알라르의 사진 작업 속 "프린스/Prince의 붉은 부츠와 푸른색 기타, " 장식이 더해진 해골 오브제와 목화솜, 크리스털 촛대와 "리처드 애버던/Richard Avedon이 찍은 존 레넌/John Lennon의 사진"에서 그의 과감한 센스를 엿본다. 나의 취향과 다른 타인의 취향을 접하는 것도 때론 재미나다.
전시 관람 시 모든 작업들을 꼼꼼히 보는 편이 아니지만, 스위스 조각가, 한스 요셉손 / Hans Josephsohn의 담담하면서 절제된 회반죽 두상작업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알라르의 사진은 풍부한 빛과 그림자에 온기가 더해 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디테일을 더하는 것보다 덜어내고 버리는 작업이 훨씬 어렵다. 아마 조각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한스 요셉손의 1957년 작업, 제목은 무제/ Untitled'가 내가 찾은 정보의 전부이다. 그래서 덤덤한 표정의 이 사람은 누구였을까? 어떤 사람이었을까? 란 호기심이 더 커진다.
이브 생 로랑/ Yves Saint Laurent, 코코 샤넬/ Coco Chanel, 데이비드 호크니 / David Hockney 등 수많은 명사들의 사적인 공간을 구경한 후, 드디어 프랑수아 알라르 / François Halard의 공간이다. "알라르는 18세 이후 한 나라, 한 도시, 한 집에서 5일 이상 머문 일이 처음"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2020년 봄 Covid 19이란 특수한 상황을 통해, <아를에서의 56일>이란 아름다운 기록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지만 그 순간의 기록과 폴라로이드라는 매개가 잘 어우러진다. 내겐 사진을 찍는 행위는 소소한 취미이자, 반복되는 일상이자, 사랑하는 사람들을 담아내는 도구이기도 하다. 아주 짧은 찰나, 정해진 프레임 속에서 레이아웃과 구성요소 및 색감의 조화, 시선의 흐름까지 계획하는 것이 마치 초고속 크로키로 썸네일 스케치를 하는 것 같아 재미나다. 결과물을 보고, 찬찬히 구도와 색과 명암을 재조정하는 것도 아이디어 스케치를 발전해 가는 방식과 유사하다. 필름카메라에서 똑딱이, 미러리스 카메라, 그리고 카메라가 내장되어 있는 휴대폰으로 간편해졌으나, 관심이나 재미가 더 가벼워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치지 않고 지속성을 갖는 취미로 내게 자리 잡았기에,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Henri Cartier-Bresson, 사울 레이터/ Saul Leiter, 프랑수아 알라르/François Halard 같은 대가들의 전시를 보는 순간들이 행복감을 준다.
"알라르가 첫 월급으로 구입한 미술품은 싸이 톰블리/ Cy Twombly의 <로만 노트/Roman Notes> 시리즈의 일부로 만들어진 석판화"였고, "아를의 집을 사게 된 계기 역시 톰블리의 집과 비슷한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시장에서 알라르의 인터뷰 영상을 보다가 빛바랜 스카이 블루 벽에 걸린 싸이 톰블리의 '로만 노트' 드로잉 작업이 낭만적이라 생각했다. 마치 휘갈긴 필체 같지만 바라보고 있으면 선의 에너지와 자유로움과 헤아릴 수 없는 억겁의 시간이 흐르는 듯했다. 마치 액자에 담긴 음악이나 시처럼.
알라르의 사진전을 통해 이탈리아 화가 겸 판화가 조르조 모란디 / Giorgio Morandi를 알게 되었다. 볼로냐에서 태어나 볼로냐에서 생을 마감한 작가. 4평 남짓되는 아틀리에에서 단순한 정물, 꽃과 화병, 풍경 등을 끝없이 사색하고 몰두, 수련하며 1,350 점의 오일페인팅과 133 점의 에칭작업을 남겼다고 했다. 알라르가 2017년 모란디의 볼로냐 스튜디오에서 담아낸 사진은 고요한 명상 같이 마음에 평온을 준다. 모란디만큼의 치열함은 어렵겠지만, 일하는 시간엔 게으름과 잡념을 좀 덜어내고 집중과 차분함을 배울 수 있기를 희망하며 내 작업실 방 한편에 구입한 포스터를 붙여 둔다.
오래전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작업을 보고 작업 속에 스며든 분노와 우울, 불안감에서 전해지는 어두움이 무섭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프리다 칼로/ Frida Kahlo의 전시를 보고 느꼈던 감정과 유사했다. 그렇지만 알라르의 사진을 통한 그녀의 단출한 사적인 공간은 그 기억을 벗어던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낡고 남루한 집에서 작업에 천착했던 부르주아의 흔적들"이란 도록의 표현처럼 어두운 경험의 잔재를 작업적 고뇌로 승화하여 삶의 치유를 했을 것이다.
모던한 공간을 좋아하는 내게도 시대를 초월한 건축물에는 매료된다. '비지트프리베 | Visite Privée'의 수많은 사진 중 유독 마음이 갔던 사진. 16세기 르네상스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가 설계한 베니스의 아름다운 빌라의 긴 창에 햇살이 쏟아지는 찰나가 담긴 이 사진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곳은 1920-1930년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같은 명사들이 교류했던 장소라고도했다. 우측의 유려한 곡선으로 가득 찬 조형물은 "팔라디오 500주년을 기념해 2008년에 설치된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듯한 공간이자 전설적인 건축가들의 자취를 잠깐의 시선으로 디디면서 걷는다.
푸르른 청량감과 고고한 화이트가 떠오르는 그리스 작업. 정겨운 슬라이드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알라르는 2020년, 패션 사진작가의 눈으로 특정 도시나 국가를 바라보는 루이비통의 단행본 시리즈, '패션 아이' 그리스편을 통해 지극히 개인적인 여정과 시선을 담은 여행 사진들은 발표했다"라고 했다.
명품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나 아티스트로서 마크 제이콥스/ Marc Jacobs를 좋아한다. 클래식한 회화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지만, 트렌디한 색감의 팔레트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단연코 패션의 영역을 주목하면 된다. 그만큼 유행에 민감한 분야가 패션이다. 뉴욕의 패션이 밀집되어 있는 7번 애비뉴에 있는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를 다니면서, 치열함의 결이 다른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지만, 패션업계가 얼마나 경쟁에 앞다투어 자리매김을 하고 성장하는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루이뷔통/ Louis Vuitton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거치며 자신만의 브랜드를 구축한 마크 제이콥스는 패션과 현대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알라즈가 조명한 "미술품 수집가로서의 제이콥스"의 사진은 위트 넘치는 그의 취향이 반영되어 있다.
루이스 바라간/ Luis Barragán은 내가 태어난 1980년 프리츠커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을 수상한 멕시코 건축가이다. 알람브라 궁전에서 감명을 받아서였을까? 물을 공간에 끌어들여 푸르른 빛깔이 주를 이루고, 멕시코의 강렬한 색감이 어우러진 공간을 알라르는 좀 더 클로즈업하여 촬영하였다. 연속적으로 배열된 일곱 점의 사진을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데 마치 추상미술의 접하는 것 같았다. 감성적이며 선명하고 맑은 이국적인 색감에 압도된다.
전시를 다 보고 피크닉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으로 올라왔다. "마침 옥상에 정영선 선생님이 심으시고 이대길 정원사님이 가꾸신 나무들이 봄비 속에 한꺼번에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란 조유리 님의 포스팅 문구 그대로 싱그러움이 눈앞에 나타났다. 흐릿한 비 내린 오후 하늘이 봄의 생명력으로 이렇게까지 화사할 수 있구나 감탄을 한다. 다음 전시 기획이 기대되는 피크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