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터의 짧은 여름휴가
올해 2월의 도쿄여행이 좋기도 하고, 3박 4일이란 짧은 일정이 아쉽기도 해서 이번 여름에도 한번 더 도쿄에서 나흘간의 체류를 즐기기로 했다. 이방인으로 낯선 언어가 가득한 도시에 머무는 시간은 마법 같다.
미니멀리스트와 거리는 아주 멀지만 다행히 물건을 아주 오래 쓰고, 옷을 오래 입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어쩌면 인간의 수명보다 옷의 수명이 길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기도 해서인지, 의도적으로 요즘은 의류 쇼핑을 자제한 것 같다. 그런데 여행 때 뭘 입지? 대부분 20-30대에 구매한 오래된 옷들 중에서 골라, 편한 신발과 함께 가방을 챙겼다. 그때보단 살도 많이 찌고, 체형도 변했으나 아직은 맞는 옷들이 있어 다행이지?
Day 1
짧은 일정이므로 위탁 수화물 없이, 기내용 작은 캐리어백을 챙기고 미리 예약해 둔 5400번 공항리무진버스에 탑승했다. 설렘에 잠을 뒤척인 탓에, 아침 6시가 조금 넘어 탑승한 버스에서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잠이 들지 않았다. 창 밖의 인천 바다가 보이니 이제야 여행의 시작인 것처럼 느껴진다. 모바일 체크인으로 탑승권도 발급받았고, 면세점도 건너뛰어서 공항 도착 후 탑승수속 시간이 단축되니 탑승 전 2시간 정도 여유가 생겼다. 지난 2월엔 면세품 인도장 근처 라운지가 인파로 무척 붐비어, 조금 한산한 제2터미널 마티나 골드 라운지를 들어섰더니, 귀여운 로봇이 반겨준다.
언제 방문해도 쾌적하고 좋은 인천공항에서 어느새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애플페이로 스이카 충전도 용이해졌고, 라인페이도 가능하며, 트래블로그 사용도 편리하길래, 별도로 환전을 하지 않았으나, 아직 현금만 가능한 곳도 있기에, 공항에서 트래블로그를 통해 조금만 인출하기로 했다.
입국장에서 나와서 Visitor Service Center 쪽에 ATM이 위치해 있다. '트래블로그 카드 세븐뱅크 ATM 엔화 출금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International card를 선택->한국어를 선택->카드삽입->수수료 안내화면 확인 후 확인버튼->신용카드, 보통예금, 당좌예금 중 출금계좌를 선택하는 화면을 건너뛰기->비밀번호 4자리 입력 혹은 6자리일 경우 4자리 비밀번호 뒤에 00 입력->출금할 금액을 선택->엔화를 누르면 출금
엔화 동전 사용이 익숙지 않아 현금사용이 불편하다고 느꼈었는데, 이젠 거의 대부분 캐시리스로 가능했고, 매번 느끼지만, 애플워치에 교통카드 기능이 되는 것이 너무 편했기에 한국도 애플페이에 교통카드 기능이 빨리 추가되면 좋겠다.
나리타 익스프레스를 타고 도쿄역으로 향했다. 2:45 도쿄역 도착이니 3시 체크인에 딱 맞추겠다. 도쿄역 M8-M12 출구 지하연결 통로 쪽 Marunouchi Oazo 간판이 보이면 바로 마루노우치 호텔 지하 입구가 보인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산 생수 패키지의 스누피 콜라보가 귀엽다.
도쿄는 30도를 웃도는 무더위의 시작이라 긴소매에서 민소매로 얼른 갈아입고, 긴자(銀座 ぎんざ)로 향한다.
긴자식스는 두 블록을 연결한 거대 쇼핑센터인데, 파사드 디자인에 수많은 유명 건축가와 디자이너가 참여했지만, MUJI로 유명한 일본 디자이너, 하라 켄야 (はらけんや, 原研哉)의 미니멀한 로고가 가장 인상 깊다. 긴자식스는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인데, 마침 좋아하는 프랑스 아티스트 장줄리앙(Jean Jullien)의 설치작업이 있어 소리 없는 탄성이 터졌다. 어디서 마주쳐도 참 기분 좋은 작업이다.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며 다양한 각도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 더 신선했다.
친구가 추천한 긴자식스 4층의 나카무라토키치(Nakamura Tokichi 中村藤吉本店 銀座店)로 이동해, 유부 생차소바 젤리세트(きつね 生茶蕎麦 ゼリイセット)를 시켰다. 함께 곁들여 주는 냉차와 온차는 어린 찻잎으로 만드는 우전차와 유사한, 맑고, 곱고, 운치 있는 향과 맛이었다. 워낙 유부를 좋아해서 커다란 유부가 더해진 소바정식도 별미였다. 여행지에서만 맛볼 수 있는 메뉴로 식도락의 좋은 시작이다.
츠타야 서점을 좋아하지만 특히 예술서적에 집중한 긴자점은 언제 와도 눈이 즐겁다. 북커버들만 하나하나 구경을 해도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긴자식스에서 나와 Marunouchi Naka-Dori Ave를 따라 걸었다. 잘 정돈된 거리와 선물 같은 노을이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행복감과 감사함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샤를드골공항이 떠오르는 CDG 매장. 대학원 다닐 때 뉴욕 소호의 Comme des Garçons 매장 파사드가 너무 멋져 막연하게 프랑스 브랜드라고 생각했는데 일본 브랜드라는 걸 최근에 알았다. 거리를 걷다 마주친 매장을 구경하며, 조카 생일 선물을 고르다 나도 똑같은 꼼데가르송 x디즈니 후드집업을 구매했다. 2년 전 디자인이라는데, 유행을 타지 않고 잘 입을 것 같고, 민소매만 챙겨 왔더니 에어컨을 세게 트는 실내에서 잘 입고 다녔던 것 같다.
거리가 예뻐서 한 참을 걷다 발이 아파서 마루노우치 브릭 스퀘어의 벤치에서 잠시 쉬어갔다. 잘 꾸며진 조경의 아름다운 꽃들이 예상치 못한 웃음을 안겨준다. 엄마가 첫날 저녁으로 히츠마부시가 드시고 싶어 하셔서, 마루노우치빌딩 Hitsumabushi Bincho Tokyo Marunouchi Building (うなぎひつまぶし名古屋(なごや) 備長(びん-ちょう) 東京丸ビル店)으로 서둘렀다. 8시가 주문 마감이었는데 주문마감 직전에 도착해서 입구의 작은 좌석에 앉았는데, 잠시 기다리라며 식당에서 가장 좋은 창가자리로 옮겨주셨다. 아름다운 우드펜던트 조명이 창문에 데칼코마니처럼 반사되고, 그 뒤로 도쿄역 야경이 펼쳐졌다. 타인의 친절함은 언제나 감동이다.
완벽한 식사를 마치고 화려한 도쿄의 야경을 걸으며 호텔로 향했다. 마루노우치 빌딩은 누가 설계했을까? 로비의 우드패널이 아름다워서 나무를 즐겨 쓰는 건축가 쿠마 켄고 (くまけんご, 隈研吾)가 아닐까 생각을 했지만, 잘 모르는 영국 건축가 작업이었다. 이전 여행에서 쿠마 켄고의 킷테 (Kitte)와 스타벅스 The Tokyo Roastery를 가봤으니, 이번엔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을 예약해 두고 기대 중이다.
긴자에서 테이트 모던(Tate Modern)과 송은 신사옥을 설계한 스위스 건축가 헤르조그 & 드뫼롱(Herzog & de Meuron)이 디자인을 맡았다는 글로벌 플래그십 점포인 ‘유니클로 도쿄(UNIQLO TOKYO)’의 건축 디테일도 궁금했는데, 그건 다음 여행을 기약해야겠지?
Day 2
몇 년 전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도쿄 국립서양미술관에서 그의 전시를 봤던 기억이 참 인상적이었다. 우에노 공원 안의 또 다른 미술관인, '도쿄도미술관'에서 열리는 앙리 마티스의 전시를 예매했다. 우에노 공원(Ueno Park 上野恩賜公園)에 조금 일찍 도착해, 스타벅스 우에노 온시 공원점 (Starbucks Coffee Ueno Park スターバックスコーヒー 上野恩賜公園店)에 들렀다. 공원에 위치한 지점인 만큼 자연이 주는 색감이 너무 아름답다.
도쿄도미술관은 서양미술관처럼 건축물이 인상적이지 않았으나, 마티스의 심플하고 아름다운 색감의 컷아웃 작품과 로자리오 성당 작업이 무척 좋았다.
전시를 보고, 우에노 공원에서 아사쿠사(Asakusa浅草)로 넘어와 도쿄 미즈마치 (Tokyo Mizumachi 東京ミズマチ)를 향해 걸으며, 필립 스탁 (Philippe Patrick Starck)이 디자인한 아사히 그룹 본사 (Asahi Group Head Office Building アサヒグループ本社 ビアホール棟)와 도쿄 스카이트리(Tokyo Skytree 東京スカイツリー)를 마주쳤다. 아사쿠사역과 TOKYO SKYTREE역을 잇는 TOBU SKYTREE LINE의 고가철로 아래의 복합상업시설이 ‘도쿄 미즈마치’이다. 미즈마치의 무야 (Mūya むうや)의 지글지글한 철판 위 프렌치토스트를 기대하고 왔는데, 일회용 포장 용기에 나와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주변 공원도 아름답고 웨이팅도 없는 데다, 큐브식빵이 유명한 만큼 프렌치토스트와 아보카도 샌드위치도 맛있었다.
뜨거운 태양아래 땀을 흘려, 옷을 갈아입을 겸 휴식을 취하기 위해 편의점 간식을 사들고 호텔에 잠시 들렸다. 뭐가 맛있는지 몰라 몇 가지 집었는데, 명란 오니기리와 살라미는 배부른 와중에도 맛있었다. 대낮의 더위는 한 풀 꺾일 시간 즈음 친구가 추천해 준 지역, 시모키타자와 (Shimokitazawa下北沢)로 출발했다.
서울의 동묘와 같이 구제옷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했는데, 젊고 개성 있는 거리였다. 빈티지패션이나 쇼핑에는 관심이 없지만 리로드 (Reload)와 보너스 트랙(Bonus Track) 등 감각적인 상업시설과 수프카레가 궁금해 일정에 추가했다. 친구가 소개해 준 곳은 (Nikkiya Tsukihi 日記屋 月日)와 'Ogawa Coffee Laboratory Shimokitazawa'였는데 아무래도 늦은 오후의 커피를 마시면 잠을 못 잘 것 같아 아쉽지만 스킵하고, 24개 로컬 브랜드가 모여있는 리로드를 산책처럼 어슬렁 구경을 하다, 2층 문구점 '데스크 라보'에 들러 조카들 선물 골랐다.
여기저기 구경하다 혹시 웨이팅이 있을까 싶어 서둘러 5:30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로지우라 커리 사무라이(Rojiura Curry SAMURAI)에 도착했다. 수프카레는 홋카이도, 삿포로의 음식이라고 했는데 다채로운 채소의 색감이 아름답고 아삭하고 신선했다. 카레의 맵기는 5로 해서 살짝 매콤했고, 무엇보다 추가로 시킨 토핑 중 튀긴 브로콜리(サクサクブロッコリー)와 6월 한정메뉴라고 하는 '오로시 폰즈 잔기 おろし ポン酢ザンギ'가 너무 맛있었다. 사실 '오로시 폰즈 잔기'가 뭔지 몰랐으나 사진만 보고 맛있어 보여서 시킨 후, 이게 뭔가요?라고 물어보니 프라이드치킨이라고 답해줬다. 튀긴 닭에 달달한 무채와 쪽파가 더해져 매콤한 카레와 잘 어우러졌다.
저녁 식사 후 '보너스트랙'은 아직 방문하지 못했으나 시간이 늦을 것 같아 시모키타자와에서 메구로시티 (目黒区 Meguro City)로 자리를 옮겼다. 비즈빔 (Visvim)은 디자이너 나카무라 히로키가 2000년에 설립한 패션 브랜드라고 했다. 신발이 참 예뻤고, 전통가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매장이 공간적으로 참 매력적이었다.
나카메구로는 늘 3월 벚꽃이 만개할 때 방문했었는데, 6월의 저녁의 거리는 참 고즈넉하여 너무 다른 분위기였다. 밤바람을 느끼며 조용히 메구로강을 따라 걷는 길이 마치 명상을 하는 것처럼 좋았다. 그렇게 도쿄의 두 번째 날은 엄마가 좋아하시는 'Green Bean to Bar Chocolate'에 들러 시나몬이 뿌려진 따뜻한 핫초콜릿으로 마무리한다.
Day 3
셋째 날은 여유롭게 일어나 호텔과 연결된 Marunouchi Oazo 5층 식당가로 갔다. 카레우동을 좋아해서, 가로수길이나 코엑스에서 즐겨 먹었던 코나야가 한국에서 철수해서 아쉬웠는데 마침 가까운 곳에 있길래 반가웠다. 신기하게도 미각의 기억이 미화된 것도 아닐 텐데, 한국에서만큼 맛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도쿄 오아조 건물의 1층부터 4층까지는 마루젠 서점이 있다. 겨우 히라가나와 인사 정도만 아는 내겐 그림의 떡인 이곳엔 방대한 양의 서적이 있다. 북커버라도 훑어보며 한 층 한 층을 내려온다.
애플 디자인팀과 건축가 노먼포스터가 이끄는 Foster + Partners가 콜라보로 디자인한 애플 마루노우치 스토어는 커다란 알루미늄 프레임으로 둘러싸인 유리케이스가 마치 거대한 아이폰처럼 연속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차갑고 현대적인 물성 안을 들여다보면 대나무를 통해 일본 특유의 선을 강조하는 디자인이 부드럽고 자연스레 녹아있다.
언젠가 친구와의 대화에서 "여행을 할 때 무엇을 하는 것을 제일 좋아해?"라는 물음에 한 가지 대답을 고르는 것이 어려워 머뭇거렸던 기억이 난다. 좋아하는 건축가가 설계한 공간을 감상하는 것, 감각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는 것, 한국과는 다른 이국적인 풍경을 마주하는 것, 현지의 맛있는 음식을 경험하는 것, 멋진 카페공간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 그리고 공원에서 산책하는 것일 것이다. 대학 때 함께 공간디자인을 전공한 친구가 얼마 전 도쿄 여행을 다녀와 기요스미 정원 (Kiyosumi Gardens 清澄庭園)을 추천해 주었다. 나와 같이 근사한 공간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친구니 믿을만한 추천이었다. 32도 고온인 날씨에 따갑게 내리쬐는 뜨거운 볕 아래 산책이라 마음이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안 왔더라면 후회했을 것이다. 메이지 시대 완성된 일본식 정원에서 경관석으로 이루어진 산책로를 거닌다. 아름다운 수국을 바라보고, 중간중간 징검다리를 건너며, 서식하고 있는 거북이와 눈이 마주치는 색다른 경험이다. 언젠가 선선한 가을에 와서 한참을 머물다 가고 싶은 곳이었다.
그렇지만 너무 덥다. 서둘러 근처에 있는 블루 보틀 커피 일본 1호점, 기요스미 시라카와 점 (Blue Bottle Coffee - Kiyosumi-Shirakawa Flagship Cafe ブルーボトルコーヒー 清澄白河フラッグシップカフェ)으로 갔다. 처음에 일어로 주문해 보려다 디카페인은 뜨거운 음료만 가능하다는 길어진 설명을 못 알아들어, 영어로 되물었는데, 메뉴 고민하는 엄마와의 대화를 들으시더니 한국어로 메뉴를 추천해 주셨다. 타국에서 한국어가 어찌나 반갑던지, 한국 직원분이 추천해 주신 뉴올리언스 (New Orleans)와 와플을 시켰다. 블루보틀 삼청동 매장을 좋아하지만, 이렇게 더운 날씨에 탁 트인 천정고와 시원한 음료, 달달한 디저트, 아름다운 생화 장식, 사랑하는 엄마와의 휴식이란 어느 장소이든 힐링의 시간이다. 일상과 현실에서 무겁고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면 여행의 이런 시간들을 통해 치유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드디어 일본의 유명 건축가 쿠마 켄고 (くまけんご, 隈研吾, Kuma Kengo )가 설계한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 (The Waseda International House of Literature (The Haruki Murakami Library) 早稲田大学国際文学館 村上春樹ライブラリー) 예약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머리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공부를 안 해도 좋은 성적을 유지했던 초등학생 때와는 달리,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공부와 담을 쌓으니, 성적이 반에서 중간쯤으로 떨어졌던 것 같다. 담임선생님이 학부모 면담에서 “아이큐에 비해 성적이 낮아요.”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다행히 중2에 접어들어 사춘기 시작의 절반은 탐크루즈를 좋아하며 영화를 보며 보냈고, 나머지 절반은 집에 있는 문학전집을 몽땅 읽으면서 보냈었다. 숙명여중 도서관도 들락거리며, 남들이 영화도 보던 ‘대부’도 책으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짧은 중2 1년 동안 나의 문해력이 형성되었고, 벼락치기를 즐기던 나의 학창 시절 성적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아마도 그 상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학생 때 친한 친구가 하루키를 좋아해서, ‘노르웨이의 숲’ 정도를 읽었던 것 같고, ‘해변의 카프카’는 집에 책이 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대학원 때 읽은 ‘1Q84’는 내 취향을 아니었으나, 도쿄여행 일정을 짜며 쿠마 켄고가 지은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이 가보고 싶어졌다. 예약을 하고 아주 오래전 선물 받았던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을 다시 책장에서 꺼낸다.
도서관 정보를 찾아보며 무라카미 하루키란 사람의 꾸준함이 존경스러웠다. 아마도 내게 가장 취약함이라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잡문집에서 ‘마흔 살이 되면’이란 군조 신인 문학상 수상 인터뷰가 있는데, ““남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남과는 다른 말로 이야기하라”라는 피츠제랄드의 문구만이 나의 유일한 버팀목이었지만, 그것이 그리 간단히 될 리는 없었다. 마흔 살이 되면 조금은 나은 글을 쓸 수 있겠지라며 계속해서 썼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대한민국도 이제 만 나이가 시행되었다. 벌써 만으로도 마흔셋. 남들보다 느릿한 인생이지만, 계속 그리고, 디자인하고, 생각하고 꿈을 꾼다면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나아지겠지?
도서관은 생각했던 만큼 좋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팬이라면 하루키 책으로만 가득한 아카이브 공간에서 좋아하는 책을 골라 읽으며 얼마나 행복할까? 한 벽 가득한 하루키의 연혁이 아직도 진행 중인 사실 또한 존경스러웠다. 그가 소장한 재즈 LP음반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도 특별했다. 배움이 숨 쉬는 것 같다는 그의 글처럼 참 좋은 시간이었다. 덕분에 와세다 대학 교정도 거닐어 볼 수 있고.
"Just Like Breathing
When I was in school, I never felt like I was a very good student. But some time after graduating from university, I came to realize just how much I enjoyed learning.
Learning is really no different from breathing. Whether you're in a classroom or not, you are constantly taking in the world around you. I hope that this library will become a place of learning where you can breathe easy, a place that will allow you to pass through walls of all kinds- whether those erected within academic institutions or along national borders. -Haruki Murakami"
셋째 날은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불꽃놀이처럼 폭발하는 날인가? 지금까지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일정이었으나, 저녁 7시에는 엄마가 고대하는 산토리홀에서 피아니스트 조성진 님의 공연 또한 예약해 두었다. 공연 전 지난 2월의 여행 때처럼 산토리홀 앞 시티베이커리에서 간단한 스낵으로 요기를 할까 하다가, 마루노우치 호텔에서 가까운 다이마루 백화점 식품관에서 도시락을 사 먹기도 마음을 바꿨다. 지하 1층은 산해진미가 가득했지만, 유명한 타키모토 (Takimoto タキモト) 매장으로 갔다. 층층이 다양한 해산물과 밥으로 구성된 초밥 드림 프리티 밀푀유 (寿司 ドリームプリティミルフィーユ Dream Pretty Millefeuille)와 토로타쿠-참치+다진 단무지 김밥 (トロタク大漁巻)과 '참치+연어+멸치' 도시락을 구매했는데 셋 중 토로타쿠 마키가 다시 생각날 만큼 맛있었다.
오늘 저녁은 오랜 조성진의 팬이자 피아노를 전공한 엄마를 위한 시간이다. 우리 둘 다 예술의 전당 공연을 보고 싶었지만, 한국에서 예매는 하늘의 별따기라 도쿄여행 겸 음악감상이 차선책이었다. 비교적 순조롭게 예매는 했지만, 임윤찬 때와는 다르게 좌석선택을 직접 할 수 없어, 엄마는 피아니스트의 손을 볼 수 없다고 아쉬워하셨고, 난 피아니스트가 연주할 때 표정을 감상할 수 있어 마냥 좋았다. 1986년에 오픈한 산토리홀은 카라얀을 자문위원으로 모셔 설계했다고 하는데, 여전히 음향시설은 훌륭했고, 고전적이지만 화려한 조명과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다. 수많은 음악가들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인 곳을 나도 한번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기쁨이 더해져서겠지?
공연 전 지휘자, Kazuki Yamada (山田 和樹)가 미리 들어와 마이크를 들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통 알 순 없지만, 그의 제스처나 표정,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말미암아 무척 유쾌한 성품의 사람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엄청난 박수 소리와 함께 조성진 님이 무대에 올랐다.
아주 오래전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기초 프랑스어를 배울 때, 선생님이 조성진에 관한 썰을 자랑스럽게 푸셨다.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가 2015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우승했으니 얼마나 대견하셨을까? 그 당시에도 명석해서 DELF를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통과했고, 프랑스로 갈 때 카뮈의 이방인을 선물하셨다고 했다. 시간이 한참 흘러, 내가 조성진의 음반을 즐겨 듣게 된 것은 '더 헨델 프로젝트'를 듣고부터이다. 클래식 애호가도 아니고, 음악을 잘 모르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진짜 집중해서 시험을 대비하거나, 정말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Artur Rubinstein의 쇼팽 녹턴 앨범을 찾아 듣게 됐는데, 조성진의 헨델 앨범이 그만큼이나 내 마음을 평온하게 했다. 그래서 최근에 밤샘작업이 있을 때 자주 들었던 것 같다.
이번 공연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 (Chopin, Piano Concerto No. 2 in F Minor)이다. 개인적으로 2악장이 너무 아름다웠고, 이 곡을 연주하는 조성진 님의 모습은 범접할 수 없는 멋짐을 지니고 있었다. 눈과 귀의 즐거움을 가득 담은 오늘도 역시 아름다운 밤이다.
Day 4
마지막 날은 나리타 공항에서 13:55 PM 비행기라 오전에 특별한 일정을 잡기가 애매했다. 게다가 지지난 도쿄 방문 때, 뜻밖의 사고가 있다고 탑승한 나리타익스프레스가 공항까지 운행하지 않고, 일본어 안내방송을 못 알아들으니 어떻게 갈아타야 하는지 몰라 친절한 일본 분 도움이 없었으면 공항에 제 때 도착도 못 할 뻔 경험이 있어, 엄마가 안전하게 일찍 출발하자고 제안하셨다.
그래서 느긋하게 씻고, 호텔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시티 베이커리에서 조식을 먹고, 짐을 챙긴 후, 아주 여유롭게 공항에 도착하기로 했다. 시티베이커리는 뉴욕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동네에서 좋아했던 가게였다. 특별한 메뉴가 아니었지만 그런 스토리가 더해지면, 더욱 풍성한 호감이 형성되어 하루의 기분을 산뜻하게 한다.
지난번과 같은 호텔에서 묵었는데 2월의 기찻길이 보였던 방은 운치가 있었고, 옥상 정원이 보이는 이번 방은 밤에 조용해서 좋았다. 편안함이 좋아서 아마 다음 기회에 방문할 일이 있다면 또 마루노우치 호텔로 정하지 않을까?
이번에도 별 탈 없이 감사하게 잘 머물다 간 호텔에서 체크아웃 전 인증샷을 찍고, 도쿄역에서 NEX 왕복티켓을 지정석 티켓으로 교환했다. 계란 샌드위치 좋아하는데 돌아오는 공항에서야 세븐일레븐 타마고산도를 구입했다. 달콤하고 부드럽게 입 안에서 맴돌다 금세 사라지는 샌드위치처럼 어느새 여행은 끝이 났고, 며칠이 지나서야 여행의 기억들을 사소하고 사적인 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엄마는 100점 만점의 101점의 여행이었다고 평가했고, 엄마가 행복해하시니 나 또한 특별하지 않아도 완벽한 여행이었던 것 같다.
"Since life is short and the world is wide, the sooner you start exploring it, the better." -Simon Raven.
언젠가 어디든 또 떠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