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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인이십팔호 Sep 23. 2021

예와 법은 야누스의 두 얼굴

이미 상도(常道)로서 법과 덕은 동일한 도를 표현하는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또 현실군주에 의해 집행될 경우 그 집행대상에게는 강제적으로 표출되는 법 집행이 어느 순간 자발적인 배려와 은혜로 뒤바뀌는 야누스적 모습으로 비치는 현실을 반영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치가 패업에 머물지 않고 왕업(王業)으로 전개될 수 있는 근거는 존법하는 군주의 태도가 법치를 위한 책무이행이듯, 예치를 위한 군주의 책무이행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을 대할 때는 많고 즐거움만으로 계산하지 말고 무겁고 가벼움만으로 저울질하지 말며 길고 짧은 것만으로 측정하지 말라”는 [관자]의 법가적 조언을 전제로 하면, [관자]의 예치는 통치자의 인의함양을 통한 직접적인 규범적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은 본래 서로 미워하고 사람의 마음은 사납기 때문에 법률로 다스려야 한다. 법은 예에서 나오고 예는 다스림에서 나온다. 다스림과 예는 모두 도”라는 현실인간의 이기성에서 비롯한 규범적 기제로 출현한 것이고 예에 의한 지배, 더 나아가 도덕적 지배는 법에 의한 지배와 동일한 논리적 구조를 취하는 것이다.


만약 [관자]에서 예법의 선후성이 뚜렷이 구별되고, 법치의 선행과 그 성공여부에 따라 예의 성립이 가능한 것이라면, [관자]는 법가철학의 텍스트로 한정될 것이다. 그럴 경우 [관자]에서 예법의 관계는 상보성이 아니라 선후성이고, [상군서]·[한비자]가 내포한 법치론의 동의어 반복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관자] 법치론의 논리전개 과정에서 수반되는 예법의 내용조차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반대로 [관자] 법치론 이면에는 법치의 목표가 부국강병이라는 선행조건을 제시하고 최종 결과로 예의염치를 깨달을 수 있는 풍속의 교화를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라의 네 가지 기둥이 무너지면 통치자는 힘을 잃고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예의염치’의 규범은 법치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필요조건으로 기능하는 셈이다. 이 점에서 [관자]는 단순히 법가의 텍스트로 한정지울 수 없다.


그렇다면 [관자] 예치론의 실마리는 어디에서 찾아질까? 첫 단계는 [관자]에서 법과 패자만큼 예와 왕자(王者)가 동일한 논리구조 하에 정의되고 다루어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대표적인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나라에는 네 가지 기강이 있다. 하나의 기강이 끊어지면 기울어지고 두 가지 기강이 끊어지면 위태롭고 세 가지 기강이 끊어지면 뒤집어지고 네 가지 기강이 끊어지면 멸망한다 … 그 하나를 예라고 하고 둘을 의, 셋을 염, 넷을 치라고 한다”는 [관자]의 정언은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답이자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단서이기도 하다. 즉 첫 편목으로 「목민」이 편제되어 있는 것은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으로부터 그 통치방법에 부합하는 통치자로서 ‘누가 통치할 것인가?’로 전개될 것임을 시사한다. 


만약 [관자]에 법치에 기초한 패정의 논리와 예치에 기초한 왕정의 논리가 동일한 논리구조임이 밝혀졌고, 이로부터 [관자]의 정치관이 드러났다면, 이제 왕패(王覇)의 동일성을 이해하는 논거를 이해할 수 있다. 왕패 개념의 단초를 제공하는 [순자]에서는 패자를 “밭과 들을 일구어 창고를 가득 채우고 쓸 기구를 편리하게 만들며 모집선발을 신중히 하여 재능 있는 사람을 발탁한 연후에 점차 포상함으로써 그를 이끌고 형벌을 함으로써 그를 바로잡는” 통치자로 규정한 반면, 왕자를 “인이 천하에 대단히 높고 의가 천하에 대단히 높으며 위엄도 천하에 대단히 높다. 인이 천하에 대단히 높기 때문에 천하가 친근히 여기지 않을 수 없고 의가 대단히 높기 때문에 천하가 귀히 여기지 않을 수 없으며 위엄이 천하에 대단히 높기 때문에 천하가 감히 대적할 수 없는” 통치자로 규정한다. 그것은 ‘가득 찬 창고’와 ‘풍족한 입을 옷과 먹을 양식’을 ‘예의’와 ‘염치’의 정치를 위한 선행조건으로 제기한 [관자]의 논리전개와 동일한 전개과정을 보여준다. 즉 ‘누가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패자와 왕자 두 유형의 통치자인 동시에 법치에 의한 패자의 부국강병이야말로 예치에 의한 왕자의 교화와 일관된 것임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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