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철인이십팔호 Oct 03. 2021

1인자와 2인자, 그 경계 짓기

배우 한석규는 외모 반듯하고 좋은 품성을 지닌 이미지로 잘 알려져 있다. 몇 년 전 방영된 ≪뿌리깊은 나무≫에서 청년 세종을 맡은 송중기와 함께 장년의 세종을 연기하면서 역사상 가장 성군으로 칭송 받는 제왕 세종의 면모와 인간 세종의 면모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역시 세종과 같이 명민하고 훌륭한 왕을 연기하려면 송중기 같이 잘생기고 매력적인 용모를 가진 젊은 배우와 지적이고 언제든지 안정감을 주는 한석규 같은 중견 배우가 연기해야 할 것이라고 다들 믿고 있다. 그리고 의심하지 않는다. 세종대왕이 아마도 그런 배우들과 똑같이 생겼다고.


만약 완벽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1인자의 모습이 실제로는 유해진 같은 조연 전문배우와 같이 키도 작고 볼품  없으며, 권위와 엄숙함과 거리가 먼 풍모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이 과연 믿을까? 물론 배우 유해진을 폄하하거나 인신공격을 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더더욱 세종대왕이 그렇게 생겼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갖는 편견과 선입관에 의해 형성된 왜곡된 인상(印象)을 말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런 모습으로 알려진다고 하면 어느 누구도 그를 1인자로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 모른다. 사람이란 원래 자기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법이니까!


왜 1인자는 타고난 능력뿐만 아니라 외모도 출중할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래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일까? 아마도 지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우리네 삶에서 나보다 더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자에게 느끼는 열등감 못지않게 부러움과 일체화를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런 감정을 차마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우리네 현실이지만-못났다고 손가락질 받기 딱 좋은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잘난 자에게 갖는 내 자신의 초라함은 여전히 내 마음의 그늘이기도 하다.

거꾸로 1인자가 나보다 못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물어보면 100명 중 99명은 그런 일도 없겠지만, 그런 자를 1인자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어찌됐든 나보다 잘난 자가 있어야 그 다음 자리에 나를 위치시킬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2인자는 어떤 모습일까? 대한민국은 정부수립 이후부터 권위주의 체제를 거치면서 워낙 존재감 없는 약소국의 위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자격지심에 올림픽 금메달만을 유일한 가치로 칭송하고 은메달, 동메달은 아쉬움조차 떠나 비난과 폄하를 하는 이상한 풍속이 형성되어 있다. 2등, 3등은 죽을죄를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선수 당사자들이나 국민들 모두가 냉담할 정도로 취급한다.


사실 반에서 1등 한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과거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노스탤지어이자 클리셰인 것이 한국인들의 인간관계에서 통용되는 규칙이다. 지금도 여전히 1등, 제일주의를 부르짖고 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성인이 되는 20살 청춘들조차 스스로의 인격을 형성해 나가는 첫 출발인 대학의 관문에서 서열을 매겨 일류대, 삼류대, 지잡대로 분류하고 또 그 내부에서조차 농어촌 전형인지 수시인지 정시인지로 구별해서 우월감과 차별을 주고받는다. 다들 이 좁고 보잘 것 없는 땅덩어리에 위치한 고만고만한 나라에서 누구와 비교하고 구별해서 우월감과 차별을 한다는 것이 미친 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렇게 말하는 당사자인 나 자신조차 1등이 주는 우월감과 쾌감을 소 닭 보듯 무심할 수 있을까?


정말 2등은 의미 없는 것일까? 또 더 내려간 3등 그리고 4등과 5등 마지막으로 꼴찌. 무수한 인생들이 삼류라는 의식과 꼴찌라는 콤플렉스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사는 것이 과연 그들의 삶에 어떤 자극과 동기부여를 가져다주는 것일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넘버 3’ 같은 영화에서 사회풍속을 뒤엎을 정도의 반향을 가져올 정도의 지지를 이끌어 냈지만 그 때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1등의 오만방자하고 어설픈 위로로 있었고.


그러나 역사는 1인자를 추앙하는 기록으로 점철되었지만, 그 저변에 2등부터 꼴찌에 이르는 수많은 군상들의 눈물과 땀, 희생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조력이 없었다면 절대 1인자의 위치에도, 그의 시대도 열리지 않았을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그리고 1인자를 뒷받침한 부정할 수 없는 2인자들의 모습을 소개한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던 자들도 있고, 그런 위치를 갖지 않아도 세상이 인정한 2인자의 존재도 있다. 물론 여기에서 3인자 또는 4인자에 대한 배려는 사실상 또 다른 문제로 넘어가야 한다는 조건이 있기는 하다.


1등은 2등과 3등이 좌우에서 받쳐 주어야 빛이 나고 비로소 1등이라는 위치가 우뚝하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2등은 왜 우리가 관심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가? 1등이 압도적인 실력과 남다른 행운까지 겹쳐서 오른 자리라면, 2등은 압도적인 실력에서, 행운에서 약간 모자랐을 뿐이다. 또는 2등에 자족하고 1등을 인정하는 2등도, 3등도 존재한다. 왜 2등이고 은메달 땄다고 인생이 실패했거나 눈물지으려 하는가? 

2등은, 2인자는 1등과 1인자보다 더 넉넉한 여유가 있는 위치라고 볼 수는 없을까? 아직 고지가 남아 있다는 것은 설 자리가 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1인자의 자리가 그렇게도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자리라면, 또 꼴찌가 너무나 슬프고 초라한 자리라면, 양자의 우월감과 열패감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느낌을 2인자는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 2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면-2인자도 딱 한자리 밖에는 없다- 1인자가 되기 위해 가야할 경로 말고 2인자의 경로는 왜 찾지 않는 것일까? 2인자의 넉넉함이 결코 한가했기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왜 외면하는 것일까?


진정한 2인자의 길은 무엇일까? 역사에서 1인자를 빛내고 그의 시대를 열기 위해 뒤에서 자신의 피와 땀을 흘렸던 2인자는 없는 것일까? 그런 2인자만이 진정한 의미의 2인자, 진정한 의미의 역사의 조연 배우 아닐까? 그들이 있어야 주연 배우인 1인자의 역사 드라마가 진행될 수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