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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Jul 25. 2021

이렇게 쉬운 일

과외가 아닌 일을 처음 해본 것은 스물다섯의 1월이었다. 가난과 함께 자랐던 나의 부모는 내가 하는 과외 아르바이트조차 반대해왔고, 철없던 나는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경험으로 아르바이트가 하고 싶어 안달을 냈다. 특별한 계획이 없던 겨울 방학, 집 근처에서 1,2월 단기로 할 수 있다는 교복 판매 아르바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 당시 최저시급은 5580원이었고, 내가 받게 될 돈은 시간당 6000원 정도였다. 스무 살 때부터 쭉 해왔고 그 당시도 하고 있던 과외 아르바이트는 시간당 30000원이 넘게 받고 있었으니 임금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하루에 9시간을 채워 일을 하면 꽤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무엇보다 ‘나도 해봤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나는 얼른 이력서를 냈다.


 첫날,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좁다란 가게에 스무 명 정도의 알바생이 모였다. 어린 사람들 중에는 내가 가장 나이가 많은 듯했고, 나머지는 40대 이상의 전업주부들이었다. 의자도 없이 모두 쭈뼛쭈뼛 서서 한 시간 정도의 ‘교육’을 들었다. 나와 함께 3평 남짓한 공간에서 일을 하게 될 아이는 스물한 살의 승희였다. 승희는 대학교를 다니지 않는다 했고, 이미 이런 식의 아르바이트는 수차례 해 본 듯했다. 노란색으로 염색한 머리에 컬러렌즈를 끼는 승희는 능숙하게 교복을 개고, 재고정리를 했다. 점장이 있든 없든 바지런하고 능숙하게 움직이는 승희를 곁눈질하며 나는 버벅거리며 손을 움직였다.   


열 군데 정도의 교복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장은 그 당시 처음 시작된 ‘학교 주관 교복 공동구매’로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알바생들이 할 일은 먼저 몇 개 학교를 돌며 신체 치수를 재고, 그 뒤에 가게로 돌아와 교복을 판매하는 것이었다. 맞춤 교복을 제작하고 파는 것으로 구색은 갖추었지만, 실상 교복은 예전에 이미 모두 만들어진 상태였다. 이윤을 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사장은 대충 ‘90 사이즈가 30명 정도 있겠지’ 하는 식으로 어림잡고 교복을 만들었고, 사이즈별로 여유분을 두지도 않았다. 더 많은 이득을 내기 위해 남는 교복 없이 만들어진 교복의 전체 개수는, 각 학교의 전교생 숫자와 꼭 맞았다.  


 승희와 나는 쓰일 데 없는 치수를 재느라 학생들 몸에 줄자를 두르며, 2주 뒤면 빗발칠 학부모들의 항의를 머릿속에 그렸다. 예상대로 아이들의 실제 치수와 만들어 놓은 교복들은 아귀가 맞지 않았다. 학생들은 교복을 먼저 찾으러 오면 자기에게 맞는 치수를 가져가는 거였고, 나중에 찾으러 와 사이즈가 없으면 그보다 작거나 큰 옷을 가져가야 했다. 우리는 ‘딱 맞게 입어야 예쁘다’라던가 ‘곧 있으면 금방 몸이 클 것’이라는 모순된 주장을 그때 그때 꺼내며 대처했다. 교복의 사이즈들이 많이 빠진 중반부가 지났을 때, 입어야 하는 사이즈보다 두 사이즈 큰 옷을 자꾸만 권유하는 우리를 보며 학부모들은 사장의 욕심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전화로 소리치며 욕하는 것을 듣거나, 매장에서 반말과 삿대질을 받아내는 것은 알바생들의 몫이었다. 나는 그 당시에도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과외 학생의 집에 가서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 공손한 질문을 받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문제를 풀어주면 되었다. 과외학생의 어머니는 매번 예쁘게 깎인 과일과 컵받침을 받친 찻잔에 차를 담아 책상에 두셨다. 낮에는 면전에서 학부모에게 ‘미친년’ 소리를 듣다가 밤에는 다른 학부모에게 ‘선생님’ 소리를 듣자니 기분이 묘했다.


 사장은 그때서야 여유분을 만들기 위해 공장을 돌렸다. 우리가 근무하는 매장은 도떼기시장이 되었다. 몇 걸음이면 전부 돌 수 있는 작은 매장에 열 명이 넘는 학생들과 학부모가 밀려 들어왔다. 당연히 점심시간이라고 사람이 덜 오지 않았다. 승희와 나는 각자 천천히 먹으면 상대방이 분투할 것이 눈에 그려져, 겨울날임에도 뜨겁지 않은 메뉴만 골라가며 식사를 해결했다. 처음 겪어보는 환경에 내가 혼이 빠져 있으면 승희는 덤덤히 말했다.


“언니, 이렇게 쉬운 일 잘 없어요~”


 두 달간 우리가 쉰 날짜는 총 보름이 안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말은 물론이고 그 해 유독 길었던 닷새의 설 연휴에도 우리는 돌아가며 근무를 해야 했다. 이렇게 일한 적은 당연히 없거니와 휴일에 부모가 일을 나가는 것도 본 적이 없던 나는 속으로 많이 놀랐다. 그런 나와 달리 승희는 휴무 날짜를 줄이더라도 설 연휴를 꼬박 채워 일하고 싶어 했다.


 “특별히 갈 데도 없고, 일해서 돈 벌면 좋죠, 뭐.”


 승희는 “히-“하고 웃으며 말했다. 설 연휴 동안 고모들, 이모들과의 식사를 위해 어떻게 근무 날짜를 잡나 고민하던 나는, 승희 몫까지 닷새의 설 연휴 중 이틀을 쉬었다.


 승희와 나는 특별한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승희는 바로 다른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거라 했고, 나는 아르바이트가 끝나자마자 대학 동기들과 싱가포르로 여행을 떠났다. 두 달간 일해서 번 돈을 나는 4박 5일 싱가포르 여행으로 전부 다 썼다. 어렵게 번 돈이라고 모두가 귀하게 쓰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싸다는 싱가포르에서 쾌적한 쇼핑몰과 놀이공원을 대학 동기들과 돌아다니며 아르바이트의 기억은 스르르 지워졌다. 여행이 끝나자마자 나는 대학생 신분으로 돌아와 다시 ‘선생님’ 소리만 들으며 살았다.


 매장 손님들의 여러 무례에 나는 사실 타격받지 않았다. 속으로 ‘아줌마가 교양이 참 없으시네.’라며 유유히 삿대질을 피하면 그만이었고, ‘체계가 참 없네.’하고 혀를 차며 흘려보냈다. ‘미친년’ 소리가 떠다니는 이 세계는 내가 속한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세계는 하나고, 나의 세계와 그들의 세계가 다를 리 만무하다. 승희는 어땠을까. 매일같이 전화로, 면전에서 욕설을 듣는 일이 ‘이렇게 쉬운 일’이 되기까지 승희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지금 승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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