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바리, 우리말로 순화해서 구역이라고 말하자면 아무래도 내가 오랜 시간을 보낸 몇 군데가 떠오른다. 집을 중심으로 한 우리 동네, 다녔던 학교나 회사의 근방, 어린 시절 살았던 마을 등등... 그렇지만 오래 시간을 흘려보냈다고 해서 그 근처가 모두 내 구역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동네의 구석구석에 내 시간을 켜켜이 쌓는 일을 해야, 그곳은 비로소 내 구역이 된다. 이를테면 모교가 있는 동네의 내 구역은, 학교를 중심으로 내 발자국이 남은 구간까지다. 비유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내 발자국이 남은 곳. 내가 주로 이용하던 지하철 역에서부터, 버스정류장에서부터 학교까지의 구간만이 내 구역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
대학생 때부터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약 6년 정도의 기간 동안 성북동에 있는 청소년 쉼터에서 교육봉사를 했다. 성북동을 아는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동네의 구석구석까지 지하철이 닿아 있는 그런 종류의 동네는 아니다. 내가 다녔던 그 쉼터는 특히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간 뒤에, 버스정류장이 닿지 않는 곳까지 언덕을 올라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필 또 한성대입구역은 4호선만 지나가는 역인데, 그 환승역이 많은 4호선도 6호선 종점 우리 집에서 출발해 가려면 지하철만 2번을 갈아타야 했다.
이러저러한 번거로움이 싫었고, 많은 여자들이 한때 그랬듯 지상 과제로 다이어트를 삼고 있던 나는, 걷기를 택했다. 가는 길은 시간만 촉박하지 않으면, 오는 길은 항상, 때로는 한성대입구역부터 30분, 때로는 더 전에 내려 1시간, 2시간이 되도록 걸었다. 그러면서 먹음직스러워 보이거나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식당이 있으면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다음 봉사 때 일찍 와서 혼밥을 수행했다. 그때는 혼밥이 어떤 문화처럼 떠오르기 전의 일이었고, 그 시절의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꽤나 신경 썼기에 나의 다른 구역들에서는 혼자 먹는 일을 되도록이면 피했다. 꼭 혼자 먹어야 하면 편의점에서, 아니면 학교의 여자휴게실에서, 심지어 학생식당에서도 혼자 밥을 먹지 못했다. 그렇지만 여기 성북동은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내 구역'이니까. 이 동네에 마음에 드는 식당에 대한 예의는 혼밥이었다.
그리고 봉사를 마치는 저녁 9시 집에 오는 길이면, 다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1시간을 걸었다. 넬의 4집 앨범, 자우림 노래, 데파페페의 기타 연주... 플레이리스트는 날마다 바뀌었지만, 내가 다니는 길은 항상 휘황찬란하지만 무섭지는 않을 정도의 빛이 있었고, 붐비지는 않지만 너무 고요해서 무섭지 않을 정도의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그리고 지하철 역에 도착했을 때 발이 아직 힘이 남아있고, 귀에 들리는 노래를 마저 듣고 싶으면 다시 다음 정거장까지 걸었다.
성북동을 다니던 6년 동안 나에게는 두 명의 남자 친구가 있었다. 동시에 두 명이었다면 이 글이 좀 더 흥미로워졌을 테지만, 그건 아니고 말하자면 전반전 3년의 남자 친구와 후반전 3년의 남자 친구. 전반전의 남자 친구는 성북동에 초대된 적이 없었다. 나를 데리러 온 적은 있지만 두 발로 성북동을 밟은 적이 없으니 나도 들여보내 준 적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후반전의 어느 날, 걷다가 '길상사 가는 길'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핸드폰에서 검색된 도심 속 언덕 꼭대기에 있는 절과 정원을 화면으로만 보기는 너무 아쉬웠다. 그래, 이제는 내 구역이니, 내 사람을 초대할 때다. 처음으로 내 구역에 초대된 그 친구와 언덕을 걸어올라 길상사를 구경했다. 우리 둘 다 천주교 신자였음에도, (심지어 그 데이트는 세 번째 데이트였다) 6월 여름날의 녹음이 우거진 절과, 곳곳의 법정스님의 글들은 기억에 오래오래 남았다. 내려오는 길은 일부러 큰길 말고 샛길을 찾아 걸었다. 그러다 여기에 어떻게 사람이 찾아오지 싶은 주택들이 늘어선 좁다란 길 귀퉁이에 '느낌가게'를 발견했다.
느낌을 주문하고 음료를 마시며, 그 느낌에 관한 질문에 답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남긴 답을 읽어보는 프로그램이 있는 카페였다. 그래도 꽤 오는 사람들이 있었던지 내가 골랐던 '설렘'상자에는 꽤 많은 종이가 들어있었다. 길상사를 오르내리는 셔틀버스를 탔다면 아마 땀은 좀 덜 났겠지만 이런 곳은 절대 몰랐겠지. 지금은 성북동에서 혜화동으로, 그리고 다시 명륜동으로 이사까지 2번은 한 모양이다.
그 시절 나의 구역에 처음으로 초대했던 그 친구와 며칠 전 함께 산책을 했다. 그는 우리의 첫째 아이를 안고 있었고, 나는 배 안에 우리 둘째를 품고 있었다. 그냥 걷기 아쉬워 말놀이를 시작했다. '하루키의 굴튀김'처럼 한 사물과 자신의 관계로 자기소개를 하는 놀이였다. 배낭으로 시작된 남편의 자기소개의 인트로는 다음과 같았다.
현대에 대부분의 이동은 바퀴로 이루어지잖아. 차를 타고,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바퀴 달린 것을 타면 세상은 좁아지고, 걸으면 세상이 넓어져.
그런데 멈춰있잖아? 그러면 세상은 다시 좁아져.
성북동이 떠올랐다. 지금은 느낌가게도 없고, 내가 만나던 쉼터의 아이들은 모두 성인이 되었으며, 근 몇 년간 가지 않았던 성북동이지만. 그곳은 여전히 나의 구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