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혼자 산다, MBC -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무언가에 미쳐 살았을 때가 있을까? 고등학교 3학년때는 남들처럼 수능을 열심히 준비하긴 했다. 더 이상 열심히 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반수 생각을 깔끔하게 접었을 정도였다. 대학도 열심히 다녔다. 대학에서 특히 힘들다는 매일매일 예습 및 복습하기를 실천하느라 도서관 문이 닫히며 흘러나오는 교가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직장인이 된 지금도 그렇다. 아침 해가 뜨면 밤새 두드려 맞은 듯한 몸을 이끌고 출근을 한다. 하지만, 이른바 인생의 발달과업이라고 불리는 것들 외에, 내가 정말 작은 관심을 시작으로 사랑하게 된 일이 있을까? "난 이 일이 너무 좋아서 거의 미쳐있다시피 하다 해"라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까?
답은 "아니오"이다. 중학생 때 애매하게 발을 담갔던 덕질은 "나 이 아이돌 좋아해"라고 말하기까진 애매한 수준이었다. 대학생 시절 방학 내내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각종 책을 탐독했지만 결국 두 도시 이야기와 노인과 바다도 읽지 않은 채 영문과를 졸업했다. 영화를 참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만큼 집중해서 보기에 그 에너지 소모가 겁이 나서 멀리 한 지 좀 됐다. 그럼 내가 열정을 다해 좋아하는 일은 뭐지? 열정은 둘째 치고, 취미라고 할 만한 일이 있긴 한지조차 의문으로 남는다.
이런 나와는 결 자체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MBC 예능 <나 혼자 산다>의 멤버들이다. 매주 방송을 자신들이 사랑하는 것들로 꼭꼭 눌러 담아 채우는 "컨텐츠 부자"들을 볼 때면 나는 부러움을 넘어 경외심까지 들곤 한다.
1. 박나래의 정원 가꾸기
단독 주택으로 이사한 박나래는 부지런히 집을 가꾼다. 고정 프로그램이 몇 개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을 만큼 TV에서 자주 보이는 그녀이지만, 바쁜 일상 속 시간을 쪼개어 직접 잡초를 뽑고 나무를 심다 어느새 정원 관리에 푹 빠져 단골 원예점까지 생겨버렸다고 한다. 정원사라는 직업이 있을 만큼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것은 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주변 돌봄을 실천하며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어 간다. 한 포기씩 정성 들여 심은 꽃부터, 취향에 꼭 맞는 소품들까지 차곡차곡 모여 박나래의 정원은 하루가 다르게 부지런한 그녀를 닮아간다.
박나래는 자신의 정원을 그저 아름답게 가꾸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에서 이런 걸 꿈꾸냐"며 누군가는 손사래를 칠 로망들을 박나래는 자신의 정원에 손수 재현해 낸다. 단골 원예점에서 돌과 식물을 구매해 정원에 하나하나 배치하고, 팔이 닿지 않는 곳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이국적인 조명을 매다는 것도 모자라 거대한 노천탕을 설치해 물을 받고 또 데운다. 하루종일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온갖 고생을 하지만, 캄캄해진 정원에 설치해 둔 조명들의 불을 탁 켜면 고르게 깔린 작은 돌들 위에서 따뜻한 노천탕이 김을 모락모락 뿜어낸다. 그 모든 조화 속에 몸을 담그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며 누워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로망'을 쟁취한 사람의 행복한 모습을 보았다. "그 고생을 해서 뭘 얻겠다고 그렇게까지 해?"라는 말의 '그 고생'을 해내고서야 만 얻을 수 있는, 나처럼 일상을 흘려보내기에 바쁜 사람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2. 트민남이 된 전현무
그게 어울리든 어울리지 않든, 사회의 시선이 어떻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열정을 다하여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 나에게는 그게 전현무이다. M세대 어딘가에 속해 있을 것 같은 그는 이른바 '젠지'문화에 빠져 있다. 어느 순간 힙한 이들은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에어팟 맥스를 목에 걸고, 구매 대란까지 일어났다는 스탠바이미를 들고 캠핑 불멍을 하는 그는 보통의 아저씨들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가 추구하는 '힙함'의 대명사일 것 같은 코쿤의 벼룩시장에서 한가득 옷과 신발을 사가는 그를 보며, 누군가는 주책맞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주책맞음이 싫지 않고 오히려 귀여워 보이기까지 하는 이유는 그에게서 즐거움과 열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이상향을 실현하기 위해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 나이 때문에 주눅이 들 만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당당함으로 맞선다. 아재 같다고 놀림을 받다가도 그 누구보다도 자연스럽게 트렌드에 녹아든 모습을 보여준다. 힙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는 전현무를 보고 있으면 나의 이상향은 무엇이었는지 고민하게 된다. 상상만 해도 흐뭇하고 실제로 그 이상향을 이룬 나를 볼 때면 행복으로 차오르는 무언가가 나에게도 있을지, 혹시 잊고 지냈던 건 아닌지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3. 이장우의 혼자 베트남음식 만들어먹기
혹시 제1회 팜유 해외 세미나를 기억하는가? 그 세미나를 온몸으로 만끽했던 이장우는 그 행복을 잊지 못해 행복의 재현을 시도한다. 베트남 현지에서 구해온 재료들과, 혀 끝으로 느꼈던 감각들을 총 동원해 그의 부엌을 작은 베트남으로 만들어버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장우가 박나래와 전현무 못지않은 "광인"이라는 것을 체감했다. 스스로를 위한 근사한 요리를 해 먹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감각만을 동원해 기억을 재현하는 일일 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장우는 그 모든 과정을 해내어, 자신의 행복한 추억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완성된 요리가 나오고, 그 요리를 행복하게 먹는 이장우의 모습을 보며 나는 스스로의 행복을 찾는 과정은 저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다.
그런 이장우가 전현무에게 전화를 하는 모습을 볼 땐 또 다른 감정이 밀려들었다. 재창조한 행복을 혼자서만 즐기는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행복을 재창조하는 그 순간은 우리가 행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듯했다. 이장우로 인해 전현무 또한 행복해졌고, 이장우는 또 다른 나눔의 행복을 얻었다. '행복은 나누면 두 배가 됩니다'를 진심을 다해 실천하는 그의 모습은 TV 너머의 나에게까지 새로운 행복을 나눠주었다.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처럼, 그들은 사실 먹고살 걱정이 나보다 훨씬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처럼 컨텐츠 부자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삶의 활력은 열정에서 얻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고, 그것을 나누는 일. 박나래, 전현무, 이장우가 살아가는 모습을 화면 너머의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 만으로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은 그 역할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루하루 월급에 대한 의무만을 채워가던 나도 스스로의 삶을 채울 의지를 충전하게 되었다. "광인"이 되어보자는 다짐과 함께, 이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