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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LY Jan 18. 2022

어느 날 괴물이 나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괴물의 아가리에서 뛰쳐나와 정신병원으로 도망쳤다.

    스무 살의 어느 날 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한 시간가량을 오열했다. 그날은 대학 입학 이후의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고, 내일은 무슨 옷을 입을지, 남은 용돈으로 밥을 어떻게 해결할지, 내일까지의 과제를 어떻게 마무리할지 고민 중이었다. 그러다가 깨달아버린 것이다, 내가 잠들기 전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내일을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생각만을 하며 잠드는 게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란 것을. 유리로 된 벽이 깨지듯 나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지만, 나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모든 순간에 우울과 불안에 잠식되어 있었다. 우울증이란 괴물은 항상 내 안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산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았는데, 이게 '정상'이 아니란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언어적, 정서적 학대의 피해자이다. 그날 밤, 울면서 마침내 이 사실을 인지하고, 또 인정했다. 가해자는 나를 누구보다 사랑했다고 믿었던 나의 아빠였으며, 항상 모든 학대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곤 했다. 하지만 학대 사실을 인지하고 난 이후에도 적절한 도움을 요청할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나는 꽤 심한 정도의 정서적 학대를 받았지만,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폭력 피해는 거의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처한 상황을 나 이외의 사람들이 학대로 인정해주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런 두려움과는 별개로, 나는 학창 시절의 나를 지배했던 우울이란 감정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동이 틀 때까지 잠에 들지 못했고, 아빠와 친척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웅웅 맴돌았다. 해가 뜨고 나서야 지쳐 잠든 나는 당연하게도 제대로 일상을 영위하지 못하게 되었다. 잠들지 못하는 하루하루가 쌓여 나를 좀먹어갔고, 아빠와 이야기하는 건 매일매일 더 고통스러워졌다. 그렇게 나는 정신과에 방문했다. 나름대로 큰 용기를 냈지만 완벽히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을 이겨낸 건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정신과 진료 기록이 남는 게 무서웠고, 그 결과 일반 병원이 아닌 재학 중인 학교 내의 건강센터를 다니게 되었다.


    수요에 비해 너무 짧은 진료가능시간 때문에 몇 주를 기다려서야 겨우 기본적인 상담과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상담을 계속할수록 처방받는 약의 종류와 양이 늘어났다. 의사 선생님과는 성향이 맞지 않아 삐걱거렸다. 내가 기계적으로 "죽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의사 선생님은 처방하는 약을 늘려주었다. 그래도 진료 기록도 안 남고, 약도 무료로 처방받을 수 있는 학교 건강센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6개월간의 진료를 받으며 약을 먹다가 건강센터의 진료 가능 기간이 끝나버렸다. 약을 끊으니 바로 다시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며칠 동안을 울며 지내다, 결국 부모님께 사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으며, 병원에서 치료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아빠가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란 건 예상했었다. 아빠는 자신의 학대조차도 나의 나약함 탓으로 돌렸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의 모든 결정을 응원했던 엄마마저 나에게서 등을 돌려버릴줄은 몰랐다. 온 힘과 사랑을 다해 키운 자식이 사실은 정신과에 다녀야 할 만큼 결함이 있는 자식이라는 걸 엄마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가 아무리 정신질환은 결함이 아니고, 정신과 병원 기록은 취업할 때 열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도 상황은 같은 곳을 맴돌았다. 처음으로 엄마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딸이 된 나는 집 안에서 딸이라는 자리를 잃었다. 


    약 없이 지낸 한 달간 수없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버텨보려 했지만, 결국은 참지 못하고 수업시간에 뛰쳐나와 온갖 정신상담센터와 병원에 전화를 돌려 진료를 예약했다. 집에는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며 일방적으로 병원에 다니겠다고 통보했다. 그렇게 나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정신병원으로 도망쳤다. 약은 점점 늘어났지만, 무기력은 점점 더 심해져 집에 가만히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물속을 부유하듯 멍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더니, 엄마와의 관계 개선도, 우울증에 차도도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흐르고, 학창 시절부터의 오랜 꿈이지만 결국 도망의 수단이 되어버린 채로 나는 교환학생이 되어 한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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