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일상 루틴은 단순하다.
대기업에 다니다가 20대 중반 출장으로 간 미국에서 골프에 입문했다는 그는 그렇게 프로가 되었고, 길지 않은 선수생활 이후로 십 년 넘게 레슨을 본업으로 하고 있다.
연습장의 운영시간은 10시부터 10시까지이지만 단발적으로 아침 7시나 8시에 개인 레슨을 진행하기도 하고, 공식적으로 일주일에 하루 토요일은 휴무라 하지만 이 날도 필드레슨을 진행하기 때문에 사실 그에게 쉬는 날은 없다.
성인이 된 이후로 한국에서 가장 오랜 시간 머물고 있는 나는 지난 20년간 하다말다를 반복해 왔으나 꾸준함 없이는 성과를 내기 어려웠던 골프에 주 5회 일정 부분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걸어서 5분 거리의 연습장을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시간을 정하지 않고 시간이 날 때마다 연습하러 가도 반갑게 맞아주는 특이한 연습장에, FM을 고집하지 않고 각각의 특징에 맞게 스윙을 만들어주는 프로를 만난 것도 행운이다.
50대에 들어섰으나 '동안'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입꼬리가 자동반사로 한없이 올라가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이 지구 상에 나이에 민감하지 않은 인간이 없음을 세상 실감한다.
50은 어쩌면 인생의 빛나는 순간을 보낸 기억이 아직 선명하고, 잘 보면 아직은 30대로 보일 거라는 착각을 하고 있으나, 그 와중에 눈앞에 '노후'라는 단어가 대롱대롱 매달려 떨쳐버리기 힘든 애매한 나이인 것 같다.
나의 경우, 개인의 삶에서는 글로벌 나이로 아직 40대 중반이라 우기고 있으며, 30대로 보인다는 말에 입꼬리가 속절없이 하늘을 향하지만, 한국에서 업무상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내일모레 오십'이라고 말하며 이만치 나이가 들었고 이만치 업력이 쌓였는데도 긴 시간 겪은 '어려 보이는 여성을 업무로 만난 남자 어른들의 시선'에 대한 피해의식이 무의식에 쌓여 얕보이지 않으려 나이부터 부풀리는 애매한 나이로 살고 있다.
이 동네에서는 이제 5년째 연습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그의 일상의 대사는 매우 반복적이다.
수만 번은 말했을 것 같은 입문자를 위한 기본 설명과 코칭, 지난 20년의 나처럼 이걸 꼭 해야 하나 하면서도 주변에서 하라고 하니 하다말다를 반복하고 있는 성과 없는 회원들에 대한 무한반복 코칭, 구력은 10년, 20년이지만 타수가 줄지 않아 다시 레슨을 받으러 왔으나 이미 아는 게 너무 많은 고집 센 회원들과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기싸움 섞인 코칭 등. 그의 목소리 톤은 일정하다. 목소리에는 큰 에너지가 실려 있지 않고, 칭찬의 말에도 영혼이 많이 담겨있지 않다.
그런 그의 목소리에 활기가 도는 진실의 순간은 연습도 열심히 하고 실력도 일취월장하는 일부의 회원들을 대할 때이다.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일상의 하이라이트.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 택배 아저씨.
그의 쿠팡 장바구니에는 늘 수십 개의 물품이 담겨 있다. 매일의 쇼핑머니가 정해져 있는 듯, 그는 잠시 손을 멈추고 눈을 위로 한번 치켜뜨며 오늘 사용할 금액이 맞는지 계산한 이후에 한두 개 품목의 결재를 진행한다. 물론 사전에 2~3회의 타 사이트 방문과 가격비교가 이루어진 이후에 말이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회원들에게 열쇠고리, 책갈피 같은 작은 가톨릭 성물과 골프티, 마커 등의 작은 액세서리, 마스크, 선크림 등을 랜덤으로 선물한다. 선물한다라는 말보다는 뭔가 '옛다, 오다 주었다'와 같은 인포멀한 동작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는 말과 행동이 다르다.
그의 말은 그동안 수많은 관계에서 그가 받은 상처에 비례하여 무심함을 연기한다.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무의식적 실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라는 어체의 공감인 듯 공감 아닌 무심함.
츤데레에 사람을 참 많이 좋아하는 그에게 그의 일상은 좀 가혹하다.
그의 365일을 채우고 있는 그의 만남에 그의 선택은 없다.
정해져 있는 기간 동안 그 누구보다 자주 보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 가볍게 친하기에 친하지 않은 관계들. 목적이 명확한 사람들.
일주일에 수차례 얼굴을 마주하며 1개월 또는 3개월의 레슨을 받고 다시 올지 말지 결정하는 건 회원들의 몫이다. 수개월 또는 1년을 연장하고 가족처럼 지내던 회원들도 그의 인생에서 수없이 사라졌다. 그가 선택한 결과가 아니다.
나의 일상에는 다시 일이 조금씩 그 세를 넓혀가고 있다. 주변은 몇 달 전부터 스멀스멀 뭔가를 시작하려는 움직임이 많아졌고, 그렇게 미팅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으며, 나의 주 5일 연습은 주 3일로 조정되었다. 화요일과 수요일 연속으로 연습실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나의 행방이 궁금했는지, 어제저녁 카톡이 왔다.
'오늘도 못 오면 내일 봐요'
메시지를 보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약속시간을 정하지 않은 약속. 일방적인 관계.
그의 시간을 채우고 비우는 많은 인연은 일방적이구나 하는 생각.
약속시간을 정하지 않고 나의 편리대로 갈 수 있는 좋은 연습장.
하지만 지난 3개월간 나의 주 5일 꾸준한 방문은 암묵적인 약속과 신뢰를 만들었으리라...
중 1 딸을 둔 싱글대디인 그는 나에게 자주 딸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고, 나는 딸에게 갖다 주라고 나의 최애 일러스트 작가의 책을 선물했다. 오후 3시 이후에 커피를 마시면 불면의 밤을 지새야 한다는 나의 말을 기억하는 그는 내가 연습장에 도착하면 시간을 확인하고 '아직 3시가 안 됐네'하며 커피를 사 오곤 했다. 사람을 알아가는 순간들이 모여, 그는 나를 회원이 아닌 친구로 받아들이는 중이었던 것 같다.
언제든 갈 수 있기에 언제든 안 가도 된다고 쉽게 생각했던 연습장의 방문시간을 친구와의 약속시간이라 생각해야 겠다. 그가 다시 무심함을 연기하지 않아도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