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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May 15. 2024

퍼포먼스 김밥

기록은 기어코 기억이 된다_ 너 김밥 잘 만다며?


"언니 김밥 못싸요?"

"응"

"어머, 그럼 제가 싸줄게요."

"너 김밥 잘 말아?"

"그럼요~ 언제 먹을까요?"


월요병이 오다 후퇴할 것 같은 일요일 오후 4시를 <김밥 만들어 먹는 날>로 정하고 H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뭐든지 의논하지만 결론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길 좋아하는 H는 김밥 약속이 오려면 72시간 이상 남았음에도 김밥 속 재료를 무엇으로 하면 좋을지 그야말로 시도 때도 없는 질문을 해댔다. 햄은 무엇으로 했으면 좋겠냐고 묻다가도 내가 원하는 햄을 이야기하면 그건 좀 별로라며 집에 스팸이 많다는 식으로 끝났고, 맛살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굳이 최고급 랍스터 맛살을 샀다며 "저 잘했죠?" 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삼겹살 김밥이 도마 위에 올랐는데, 자긴 그것도 정말 잘만들 수 있다고 하길래 나는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세상을 그렇게 오래 살고도, H에 대해 나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음에도 나는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사실 김밥은 재료가 간소해도 김과 밥의 균일도, 그러니까 밥을 짓이기지 않으면서 고루 펴 바르는 기술이 있다면, 크게 실망하지 않는 음식이다. 나는 요리하고, 나눠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어떤 요리든 곧 잘 따라 하고 웬만해선 실패가 없는 편이나 김밥만큼은 마는 족족 예외였다. 내가 싼 김밥들은 언제나 제 각각이었다. 너무 크거나, 너무 큰 것에 비해 작았다. 좋게 봐주면 개성 있었다.


소풍 전날 엄마가 김밥을 싸줄 때, 옆에서 주워 먹던 김밥 꼬다리가 얼마나 맛있었는데, 내가 만든 김밥 꼬다리엔 정 없이 들러붙은 밥알과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속 재료가 몇 개 붙어 있을 뿐이었다. 꼬다리뿐만 아니라 기술 없이 만든 몸통도 사정은 같았다. 몇 번의 노력에도 재료와 밥이 한데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것이 못마땅하여 언젠가부터 '김밥'이라는 고난도 음식에 도전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디데이, 집에서 고슬고슬한 밥을 지어 곱게 싸들고 속 재료를 준비한 H의 집으로 갔다.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자 H의 반려견 보리가 컹컹 짖고, 열렬히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반겼다. 잠깐 보리에 대해 설명하자면, 말티푸 종이라곤 믿기지 않게 온순하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만, 잠이 많은 편이라, 헤어질 때면 한껏 짜부라진 눈을 겨우 뜨고 있는 귀여운 생명체다. 보리의 열렬한 환영에 힘입어 터그 놀이 한 판을 벌인 후 작은 식탁을 펼쳤다.


주방에서 열심히 나른 김밥 속 재료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낀 건 그때였다. 김이 품을 수 없을 것 같은 스팸의 크기는 둘째고 준비한 대패 삼겹살은 하얀 기름을 품고 있었으며, 삼겹살에 같이 넣으면 꿀맛이라는 청양고추는 자르지 않은 우리가 아는 그 모습 그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이쯤 되니 김밥 속 재료로 멀쩡한 크기를 한 것은 김과 좋아하지도 않는 최고급 맛살이 전부였는데, H와 재료들을 번갈아 보며, "너무 큰 거 아니야? 안될 것 같은데?" 정말 안될 것 같아 건넨 말에 H는 그런 말 할 줄 알았어하는 눈으로 호기롭게 "안될 것 같아요? 아유 걱정 마요." 하며 태연하게 굴기에 나는 또 "너 진짜 김밥 잘 마는 거 맞지?" 물었고, H는 "나 김밥 진짜 잘 만다니까~ 이 언니가!" 하고는 눈꼬리를 추켜올렸다. 그래 조금 지나면 알겠지 싶은 마음으로 잠자코 그녀의 손동작을 지켜보았다. 초조와 의심을 품고 있는 동안 보리는 엉덩이를 내 허벅지에 붙이고는 뒤통수를 보인 채 사부작사부작 간식을 먹고 있었다.


김의 거 친면이 도마 위에 오르고, 쌀알을 능숙하게 펴는 동작이 오차 없이 이어졌다. '나쁘지 않군' 생각하려는 찰나 너무 많은,  제각각 들쑥날쑥한 재료들이 밥 위에 올려졌다. 계란 지단을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 있냐고 할 만큼 투박한 데다 칼도 아닌 가위로 듬성듬성 잘라 대충 올리는 모양새를 보니 '아 벌써부터 망했네'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거 그렇게 한다고?"나의 물음은 언제나 심각한 편이지만 "왜용?"하고 돌아오는 H의 답은 이번에도 경쾌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아니 그러면 그게 안 말릴 것 같은데?"

"다 돼요 걱정 마요, 저를 좀 믿어보세요."


H는 방지턱에 걸린 듯 '덜컹덜컹 삐거덕'대며 김밥을 말았고, 속재료들이 줄줄이 제 살길을 찾겠다며 탈출하기 시작했다.


벌써 4개월이 지난 이야기지만 김밥 재료로 벌인 충격적인 퍼포먼스가 어제일처럼 선명해, 서랍을 꺼낼 것도 없이 입가에는 웃음이 눈가에는 주름이 절로 생겨나는 기억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만든 김밥은 먹어본 최악의 맛이었다. 시종일관 자신을 믿어달라던 H가 만든 삼겹살 김밥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고, 삼겹살 김밥에 통으로 넣은 고추는 소리 없이 김과 밥과 삼겹살을 지나 도마 위로 미끄러져 낙오했다. 제 각각 재료들만 보자면 흠잡을 데 없는 최고급인데, 이리도 기이한 맛을 내는 것이 희한해서 나는 진지하게 "정말 맛없다" 했고, H는 열이 오른 건지 벌게진 얼굴로 웃으며 "어, 나 분명 김밥 잘 말았었는데...?" 처음으로 자신의 말에 꼬부라진 물음표를 갖다 붙이기에 이번에는 내쪽에서 눈을 흘겨보았다.


맛은 없었지만 줄기차게 이 김밥, 저 김밥 재료를 바꿔가며 김밥을 마는 동안 넣지 말아야 할 엄지와 검지의 라텍스까지 잘라 넣은 김밥 속 장갑이 내 입에서 발견되어 걸러져 나왔을 때, 나는 절망하며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울며 웃었고, H는 다시는 김밥 잘 만든다고 말하지 않겠다며 맹세했다. 9줄의 엉망징창 김밥이 완성되었지만, 먹성 좋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와 H가 합세하여 겨우 2줄도 못 먹지 못했다. 우리를 알고 있는 K는 김밥 일화를 듣고는  컹컹, 킥킥 같은 소리를 내며 웃어댔다.


맛있는 김밥을 먹었다면 오지 않았을 모를 월요병이 왔고, H는 짧은 반성을 마치고 이번에도 역시나 자신 있는 고기찜을 해주겠다고 불러서는 친절하게도 고기와 부추, 숙주에 엉킨 머리카락을 접시에 덜어줘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 사실 머리카락쯤은 그날의 퍼포먼스 김밥을 이길 수 없지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인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 번의 거대한 충격이 왔다간 겨울 통과한 봄에, 제철 냉이를 사다가 그럴듯한 김밥을 만들어 먹고, 남은 김밥은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다음날에 계란을 입혀 프라이팬에 지저 야무지게 해치웠다.


여전히 밥을 펴는 기술은 부족하지만, 음식 앞에서 자신감을 잃을 때마다 호기롭게 "나 진짜 잘해!" 하던 H의 태도를 본받아보기로 했다. 차차 나아지겠지, 샛길로 샜다가도 또다시 도전하며 한 뼘씩 성장하겠지. 그게 꼭 음식이 아니더라도. 수도 없이 발견하는 삶의 오차에서 오답만 되풀이하란 법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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