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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May 15. 2024

저리 가,

기록은 기어코 기억이 된다_도착한 외로움


온라인으로 좀처럼 장바구니에 넣지 않는 생물 손질 가자미를 샀다. 리뷰가 좋기도 했고, 얼마 전 인*에서 본 ‘달래갈릭버터 가자미 스테이크‘가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내게는 달래가 없지만, 푸릇한 파를 송송 썰어 얹으면 안성맞춤이겠지? 그럴듯한 그림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니, 싱싱한 가자미를 장바구니에 넣지 않을 이유도 팬에 오일을 두르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오일이 하이파이브를 외쳐도 맛만 있다면, 이리저리 치인 오늘 하루를 보상받을 수 있는 한 끼면 족하다.


어젯밤에 도착한 가자미 팩의 얇은 비닐을 떼어내자 비릿한 향과 손에 쥐면 곧 휘어질 것 같은 연한 가자미 살이 보였고 그걸 보자 ‘내가 이걸 왜 샀더라?’ 싶은 후회가 일었지만 약한 물줄기에 가자미 겉면을 헹구고 키친타월에 찹찹 두드려 물기를 제거한 뒤, 달궈진 프라이팬에 올리니 지글지글 인가? 챠챠챠 하는 소리가 났던가? 요란한 마찰음이 불안할 때마다 가자미를 주걱으로 살짝 건들었더니 보드라운 껍질과 살이 바스러지기 시작했고, 이윽고 반대편으로 뒤집었을 때 ‘엇?’ 가자미의 형체는 온데간데없이 살과 뼈가 뒤엉킨 모습이었다.


‘오늘 첫끼라고…’ 듣는 이 없는 혼잣말을 삼키고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리니, 누가 먹다 남은 식사의 끝자락이 절로 그려졌다. ‘이건 정말 아니다.’


오늘은 ‘이건 정말 아니다.’의 날인가? 아침부터 질문은 구실일 뿐인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는 이의 인성에 인류애가 멸망했고, 그 일의 연장선장에서 상사와 통하지 않는 말을 하느라 기력이 쇠했으며, 내 편일 거라 생각한 이가 장염으로 변기를 붙들고 있어 시원한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다. 내 얘기를 옆에서 옆으로 전해 들은 파트 동료 일부는 그와 누가 누가 더 어이없는 일을 겪었는지 대결하듯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깔깔댔다. 그래, 이미 지난 이야기니까 웃을 수 있지, 나도 언젠가 오늘보다 더한 날이 올 수 있고, 오늘 일쯤은 다 잊고 시원하게 웃는 날도 오겠지. 다만 오늘이 그 먼 미래가 아니기에 울 것 같은 눈으로 이따금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타인으로 인해 지구밖으로 사라지고 싶은 하루를 그대로 둘 수 없어 무엇을 하면 이 기분을 씻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작고 사소한 것부터 해나가기로 했다.


며칠 전부터 가야 돼, 가야지! 했던 타이어에 숨을 넣으러 갔더니 아저씨가 세상 친절하시다. 자전거 사 년 출퇴근자가 아직 제 손으로 공기 주입을 못하니, 이런 보살핌을 받을 때면 몸도 마음도 절로 공손해진다. 얼마라도 드리고 싶은데, 한사코 마다하셔서 감사 인사만 연거푸 하고 돌아 나왔다. 또 그다음은 희망도서로 신청한 김달님 작가님의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도서가 도착했다는 안내 문자를 받은 동네 도서관이었다. 자전거를 두고 손님 접대용으로 사둔 박카스 네 병을 작은 책가방에 챙겨 집을 나섰다. 두 병은 자전거 사장님께, 두 병은 사서분께 드리고 조금 나아진 기분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 한 일이 ‘가자미 스테이크’(?)였으나 알 수 없는 형체, 없는 맛이 전해주는 충격은 마는 족족 탈출하던 속 재료들을 입 벌리고 쳐다보던 그날, 동생의 화려한 김밥 퍼포먼스를 떠올리게 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한숨 돌리며 꽃 화분 블록을 맞추고 있을 때, 필요할 때 부재가 특기인 그에게 연락이 왔다.



"퇴근 잘했쇼"

"넹"

"저녁은"



"이것 좀 봐, 내가 가지미를 구웠는데"

"이게 무슨"

"이게 무슨 일이야?"

"윽, 저 비주얼 고양이 간식 같아."

"고양이도 안 먹을 것 같은데?"

"다행이다. 내가 아니라서" (와, 와중에 자기 생각)


사사로이 이어지던 대화도 저편으로 사라지고, 깨지라고 있는 약속에 마음이 상할 때쯤 잠에 들었다. 지친 하루에 도착한 달콤할 리 없는 얕은 잠에 깨어난 지금은 나 스스로를 독립적인 인간이라고 치켜세우던 내게 좀처럼 올 것 같지 않았던 외로움이 들러붙은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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