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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Apr 21. 2024

세기가 저물었다

2024.02.26


정강이에 상처가 생겼다. 마침표라고 하기에는 크고, 점처럼 보이기엔 너무나 선명한 붉은색의 상처는 할매의 집에 들렀다 언니의 차에 오를 때 생긴 일명 문콕의 흔적이었다. 피가 날 것 같더니, 멍이 들 것 같더니, 천천히 상처의 색이 바뀌는 동안 모양만은 그대로인 상처를 따라 그려보았다. 아주 작은 동그라미였다.


그날 출근 준비를 마친 새벽 6시 55분 큰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평소와 다른 시간대에 걸려온 전화는 불길한 법이라, 전화를 받자마자 "왜?"라는 물음이 달려 나갔다.


"할매가 돌아가셨데"


서둘러 던진 질문과 달리, 잠시간 침묵이 달려와 안겼다. 이상할리 없는 전화였다. 언제가 이런 날이 올 것임을 예감했으니까. 이상하리만큼 덤덤한 와중에 얼마 전 무릎 수술을 한 엄마가 먼저 걱정되었고, 설에 할매와 다투고 울며 집에 간 막내 이모까지 생각하니 어쩐지 빈속에 체기가 올라오는 듯 답답했다. 큰 언니와 간단히 통화를 마치고, 엄마에게 전활 걸었다.


"엄마"

"응"

"울어?"

"그럼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울지"

"응. 마음 잘 다스리고 있어. 곧 출발할게"

"응. 조심히 빨리 와"


살아있는 사람은 내일을 준비하며 살 수밖에 없기에 조심히 빨리 오란 엄마의 당부에도 일단 회사에 출근해 급한 일을 정리했고, 두 시간이 흐른 후에야 동료와 직장 상사에게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전했다. 염려와 재촉을 한 몸에 받으며 근태처리를 맡기고 작은언니를 만나 강원도로 향했다. 설날이 지난 지 17일 만의 일이었다.


우리를 실은 차는 덤덤한 슬픔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재잘거리던 소리가 잦아들면 조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에 들었고, 언니와 나는 우리 할매가 몇 살이지? 이야기하다가 나는 99세, 언니는 100세로 잠정 결론 내리며, 막내 이모가 마음이 많이 아프겠단 말을 주고받았다. 사실 마음이 아픈 건 할매도 이모도 언니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막내 이모가 다음 날 막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해놓고, 울면서 전활 걸어서는 "나 집에 갈 거야. 너무 짜증 나. 엄마도 지금 안 좋으니까, 너네 나중에 와" 하고는 연휴를 빠져나와 식구들 중 제일 먼저 일상으로 복귀했고, 우리들은 어쩌다 보니 그날을 온통 까먹고, 다음 날 새벽에 귀향길에 오른 바람에 할매에게 인사를 하지 못했다. 그러니 누가 더 슬프고, 덜 슬프고 더 할 것 없이 인사 없이 작별 한가운데 놓인 사람들이었다. 사람들 말에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정을 떼려고 하는지 모질게 군다고들 하는데, 이모나 엄마의 말에 의하면 약 십 년 전부터 할매는 자식들에게 모질게 굴었다고 했다. 이모뿐만 아니라 지근거리에 사는 엄마도 엄마의 엄마 때문에 자주 울어야 했다. 할매는 창창한 나이에 자식을 셋이나 먼저 보냈고, 젊은 나이에 남편마저 잃었다. 그전에는 전쟁을 겪었고, 가난과 자신과 싸웠을 것이었다. 무너지지 않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처럼 까마득한 할매의 역사가 세기가 저물었다니, 어쩌면 나는 먼 슬픔이 아닌 실감 못한 영영 이별과 맞닿뜨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목적지가 코 앞이라는데, 장례식장은 보이지 않고 눈이 더 왔는지, 녹지 않았는지, 얼마나 재설을 못하고 있는 것인지, 인도 위의 사람들이 등산용 폴을 콕콕 찍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있을 것 같지 않은 위치에 '4444'라는 끝자리 전화번호를 발견하고 들어간 2층, 단출한 식구들 사이로 연분홍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뽀얀 할매의 영정 사진을 마주했다.


멀리 가기 전까지 자신의 끼니와 장가를 가지 않은 아들의 끼니를 챙겼던 사람. 다 구부러진 허리를 하고도 비탈진 텃밭을 일구던 사람.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왔나?" 하며 목 끝까지 차도록 먹을 걸 권하던 사람, 화투 운세를 놓지 않았던 사람, 엄마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낼 때면 미워 죽겠던 그 사람이 내가 알던 사람의 마지막 모습인 줄 알았더니 영정 사진 속 할매의 모습이 어찌나 뽀얗고 예쁜지, 멍하니  사진을 보고 있는데, 열여덟 살 차이가 나는 막내 이모는 내가 도착하자마자 나와 엄마의 통화 내용을 복기하며, "너네 엄마 울었다고 해놓고 여적 한 번도 울지 않았다"며 고자질했고, "엄마 그랬어?" 하는 나의 물음에 엄마는 씩 웃고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런 엄마와 이모에게서는 나와 큰언니의 모습이 교차했다.


부고 소식에 어찌어찌 한 곳에 모이긴 했어도 실감 없는 가운데, 울음을 터뜨리다가도, 밥을 먹고, 손님을 맞고, 그 손님과 같이 울고, 잔 심부름을 하고, 얼굴도 가물거리는 친척들을 만나 인사하고, 와중에 엄마 친구들이 찾아오면 그 사이에서 애정을 듬뿍 받으며 반가운 포옹을 나눴다. 이런 자리에서도 반가운 얼굴이 되기도 하는구나, 나 역시 그들의 환대에 팔을 벌려 함께 끌어안으며 아빠가 돌아가시고 이 십 년 만에 가족의 장례식장에서 깨닫게 되는 이제는 가고 없는 이가 이어주는 사람의 인연에 탄복했다.


사람은 정말, 자신이 죽게 될 때를 아는 것일까? 할매의 마지막을 처음 발견한 삼촌에 의해 전해 들은 이야기는 정말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산자의 마음으로 믿게 된다. 평생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살아온 할매가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고, 일을 나가려던 삼촌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오늘은 일 안 가면 안 되나?"

"가야지, 왜?"

"안 갔으면 좋겠는데..."

"가야 돼"

"그러면 가기 전에 날 저기에 앉혀줘라"

"우리 엄마가 웬일이여"

하고는 엄마를 안아 이부자리에 앉혀드리고 나오려는데,

"나를 좀 눕혀줘야겠다"

"에에, 우리 엄마 다 됐네 다 됐어" 삼촌이 말하고

할매는 "다 됐지 그럼"


하는 평소와 같으면서도 다른 대화를 나누고 삼촌이 일을 하고, 돌아온 그 밤에 평소와 다르게 할매의 방문의 열려있어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때는 이미 할매의 몸이 차갑게 식은 후였다고 했다. 식구들에게 부고를 전하고, 경찰이 왔다 가고, 병원에서 사망 관련 절차를 밟고. 환갑 넘은 삼촌을 대견히 생각하는 건 참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속으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생각을 했고 사람들이 모이면 있을 법한 걱정, 걱정, 또 걱정 같은 것을 듣고, 이를테면 결혼 같은 것. 그들이 없는 곳에서 귀를 후비며 듣기 싫은 말을 털어버렸다.


내내 울지 않던 엄마는 입관식에서 나와 엉엉 울던 이모들을 마주하자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발인식에서는 너무 크게 울어버려 잔잔하게 이어가던 내 마음까지 와르르 무너지게 만들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식구들끼리 조촐한 식사를 마치고 몸이 불편한 엄마를 먼저 집에 내려준 후, 할매의 집에 모인 또 다른 식구들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쇠냄새가 나는 현관문을 통과해 방문을 열자, 불과 삼 일 전에만 해도 할매가 있던 자리에 따개비처럼 붙어 있는 식구들 가운데 한 사람만 없는 생경한 풍경을 뒤로하고 우리는 약속한 듯 각자의 도시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모는 잊고, 기억하기 위해 뜨개질을 다시 시작했고 엄마는 무릎 회복도 못하고 디스크까지 도져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나는 월말을 가까스로 비껴간 2월 29일에 출근해 야근을 했고, 작은 언니는 새 길을 가기 위해 기나긴 싸움 끝에 도장을 찍었다. 사람 좋은 큰 언니는 지긋지긋한 싸움을 이어가는 중이며, 수많은 문자와 전화를 무시하며 마지막까지 나쁜 놈을 자처한 엄마의 아들은 여전히 행방이 묘연하다. 세기가 저물었고,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아무도 떠나지 않고, 떠나보내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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