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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Aug 11. 2024

제철 여름손님

기록은 기어코 기억이 된다_삶의 하이픈을 이어가며


견딜 수 없이 앗 뜨거운 여름에는 한파에 속눈썹 고드름을 생성하며 걷던 기분이나 익어가는 고구마 냄새에 취한 겨울 불멍의 기억들을 떠올려 본다. 노란 불빛 아래 보글보글 끓여 나온 어묵탕과 따뜻한 정종도 그때 주고받은 재미있고 이상한 이야기를 슬며시 꺼내 되새겨보면 더 좋다. 지금은 누릴 수 없어, 조금 간절한 마음이 되는 것들에는 언제나 조그마한 힘이 있으니까. 겨울에 복숭아 절임을 찾는 것처럼, 그런 계절에 산천 푸른 날이 그리워지는 것처럼.


한 낮 온도가 무심하게 올라갈 때, 그 햇빛에 정수리가 타들어 갈 때, 땀을 쏟은 후 거울 속 추레한 나를 발견할 때, 뜨겁고 습한 이 여름이 지긋지긋할 때면 책 사이사이에 껴두었던 모양도 크기도 기억도 제각각인 낭만을 찾아보면 좋다. 들춰본 김에 플래그 아래 형형색색의 문장들을 한 번 더 마음에 새기면 좋다. 볕 좋은 가을 하늘 아래 보물찾기 하듯 주머니에 넣어왔던 몇 알의 도토리와 굽힌 등, 작은 손, 도토리가 벗어버린 모자를 주워 올릴 때의 몸짓을 떠올리면 도토리만큼이나 내가 귀엽게 느껴진다. 매일 걷던 길가에 빼곡히 심어진 풀들의 정체가 쌀알을 품은 벼라는 걸 알게 된 가을 저녁은 멀리 내다보이는 노을에서도 밥 짓는 냄새가 둥둥 떠오르는 것만 같아, 엄마가 해준 밥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작디작은 날벌레가 절대 크다고 볼 수 없는 눈으로 전속력으로 돌진해 이상한 죽음을 맞을 때면, '이게 다 여름 때문일걸?' 코 때리는 불쾌한 냄새와 절로 찌그러지는 표정에 못난이가 될 때면, 가지마다 새순 돋던, 송이송이 꽃송이를 매달고 있던 봄을 떠올려 본다. 어떤 날은 기억보다 선명한 핸드폰 속 나무의 생을  찾아본다. 목련과 벚꽃, 라일락과 꽃사과, 아카시아와 조팝, 이팝의 무늬와 결을 떠올려 본다. 작은 언덕을 친구들과 함께 오르며 처음 탁구를 배우러 가던 날을 떠올려 본다. 친구들의 '잘한다. 잘한다' 우쭈쭈에 수줍어하던 날들을 떠올려 본다. 정말 조금 잘하게 되었을 때, '이게 정말 되네?' 했던 기특한 마음까지 돌아보면 계절의 흐름만큼이나 성장한 내가 보인다.


측정 거리에 따라 60-120 데시벨을 자랑하는 매미 울음소리에 기겁하는 날이면 내가 좋아하는 오지윤 작가의 책 <작고 기특한 불행> 속 ‘펑크족의 신념’을 떠올린다. 낮밤에도 좀처럼 닫지 않는 베란다 문이라지만 기어코 집으로 들어온 크고 작은 벌레에 기겁할 때, 미처 발견하지 못한 얼룩을 발견할 때면 집에게 조금 더 신경 쓰자고 다정하고 단정한 사람이 되자고 마음먹는다. 작년 봄부터 여름까지 글쓰기를 이어오며 생활 곳곳에서 찾아온 작은 행복 중에 여름 복숭아가 있어 이번 여름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오기도 전에 빨리 갔으면 했던 여름이 딱딱이 복숭아로 좋아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이상하기도 했지만, 딱복이 좋아 딱복이 오는 여름이 좋아진 데는 좋아하는 게 있다면, 그게 또 먹는 것이라면 한없이 말랑해지는 성격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한 입 베어 물면 츄릅츄릅 입안 가득 단 맛을 뽐내는 물복도 좋지만, '아삭하고 은은한 단 맛'이 일품인 딱복은 작년 여름 당도 없는 물 수박에 호되게 당하고, 뽀얗고 단단한 딱복에 눈뜨며 1일 1복 복스러운 나날을 보낸 후에야 내가 기다린 최초의 여름손님이 되어주었다.


때때로 여름이 싫고, 후덥지근한 열기가 두통을 불러오겠지만, 한 밤 빛을 찾아온 불청객을 마주할 때는 모골이 송연해지고, 이따금 찾아오는 햇빛 알레르기 또한 원망스럽겠지만, 지나간 추억과 다가올 그리운 것들과 지금만 누릴 수 있는 것들 사이에서 삶의 하이픈을 이어나가고 싶다.


<제철>이란 단어에 빠져들어 자음 모음을 들여다보면 문득 사람의 마음이 제철일 때는 언제일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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