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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Oct 15. 2023

"귀신도 봐?"

기록은 기어코 기억이 된다_잠


조금 긴 단발, 뒷모습, 야트막한 턱을 가진 신발장을 뒤로한 채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가 방을 나서며 뭉툭하고도 희미한 마찰음과 함께 시작된 꿈이었다. 손도 얼굴도 없는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고 신발장을 지나 좁은 복도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벽이 있었지만 없었고 복도는 아득하게 이어져 있었다. 나의 몸부림에도 도미노 블록처럼 많았던 체리색 방문이 기척 없어 더없이 매정해 보였다. 누구라도 알은척해주면 좋으련만.


그게 내가 기억하는 첫 가위눌림 <수면마비&렘수면상태>이었다. 우리가 명명한 ‘가위눌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수면장애’ <<정상적인 렘수면 중에는 호흡근육과 눈 근육을 제외한 인체의 모든 근육의 힘이 빠진다. 원래는 의식이 깨어나면 근육의 마비도 풀려야 하지만, 다양한 이유로 의식만 깨어나고 근육 마비가 풀리지 않으면 가위눌림 현상으로 이어지는 것>>


내가 인식하는 가위눌림은 압력이 가해지는 순간부터이다. 어쩌면 그것이 꿈의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속삭이거나 차가 쌩하고 스치는 소리가 귓바퀴 언저리서 시작될 때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몸 어딘가를 가까스로 움직여 깰 때까지 지속된다. 어떤 날은 스탠드를 켜거나 자는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 효과가 있고, 또 어떤 날은 깼다고 생각하는 순간도 꿈이고, 스탠드를 켰다고 안도하는 순간도 꿈이다. 그런 꿈이 반복되어 몇 번이고 뱅글뱅글 맴맴 돌다 잠을 물릴 때 비로소 꿈에서 벗어나 현실에 당도한다. 어떤 가위눌림은 단번에 두려운 기운에 휩싸이고, 쨉을 날리듯 굵고 짧게 원투 펀치를 쏘며 반복되는 가위눌림에는 대책 없이 화가 나 허공을 향해 소릴 지르기도 하지만 그저 이것을 꿈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도 생생하고 가까워 무섭다는 것이다. ‘가위눌림’중 빈번하게 지속되는 꿈은 누군가 뒤에서 안을 때 몸의 마디마디에 새겨지는 압박감과 모골이 송연해지는 서늘함이었다. 어째서 나는 지속적인 가위눌림에 시달리는 걸까?


전문가들은 ‘수면 장애’ 이유를 <<스트레스, 수면부족, 과로등 체험자의 심신에서 찾는다고 한다.>> 본래 스트레스나 과로 없이 살아본 적이 없으니 일찌감치 기질이나 볶아치즘에 익숙한 삶이라 생각하기로 했고 수면 양이 부족할 때도 있지만, 적당할 때도 풍부할 때도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이라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어디로 가든 여기가 마지막 종착지라고 귀결 지으려는 건 아니지만 이제 ‘심신’ 하나만 남는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나는 기가 약한 것일까? 피로를 온몸으로 발산하며 쇄골까지 다크서클이 내려올 때면 사람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잠’으로 갔다가 ‘기’로 빠졌다. 여전히 내 주변에는 ‘가위눌림’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단 한 번도 ‘수면마비’ 없는 청정한 삶이라니, 나로선 그들의 밤잠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호기심 충만하게 나의 꿈에 대해 궁금해하고 이야기를 전할 때면 어느새 이마에 삼지창을 짙게 새기고는 ‘으으’를 연발하거나, “귀신도 봐?” 같은 말을 던지는 이도 있었는데 나름 심각한 얼굴로 “귀신은 못 봐” 하면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이 되기도 했다. (너는 내가 귀신까지 보면 좋겠니? ʘ̥_ʘ)


영화 <잠>에서 현수는 “누가 들어왔어”라는 대사를 시작으로 보는 내내 내 심장을 짜부라지게 했다. 현수의 <잠>과 나의 <잠>은 다르나 현수로 인해 잠 못 이루는 수진은 어떤 면에서 가위눌림을 경험하는 이들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꿈에 시달리다 보면 잠을 거부하고 싶어지기도 하니까.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의학적 근육마비가 가위눌림이 언제까지 나를 쫓아다닐지. 한 밤에 나를 찾아와 원치도 않는 귓속말로 압박을 하고, 모골이 성연 하게 만드는 이는 누구인지 끝을 알 수 없는 미로 속에 갇힌 기분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잠이 평화롭지 못하다는 것은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다. 이 이야기는 어젯밤 이야기, 당장 오늘 밤의 일일지 모를 근거리에 있는 꿈의 미스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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