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기어코 기억이 된다_02
오랜만에 도착한 김포공항은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퉁명스럽고 짜증 섞인 공항 직원들의 응대는 변함없었고, 맞대응하듯 나 역시 표정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내보였지만, 게이트를 통과하기 전 새 마음일 수 없다는 것이 어쩐지 억울하기만 했다. 한편 또 다른 게이트 앞에서는 그와 상반되게 지나치게 친절한 승무원들의 멘탈을 걱정하기도 했다.
호와 불밖에 없는, 냉 온탕을 겪으면서 ‘이 사람들 나만큼이나 중간이 없구나. ’ 생각은 윙윙 거대한 소리를 내며 공중을 가르는 비행기만큼이나 앞질러 갔다
그 사이 우리 집 욕실은 벽, 바닥에 깔린 각 2장 총 4장의 타일이 올 철거 되었고 방수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저녁에 회사 동생이 철거 후 방수 사진을 찍어 보내주기로 해,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비행기 출발 지연으로 인해 도착이 늦었지만, 제주 터미널에 위치한 해동식당에서 국밥을 먹을지 국수를 먹을지 고민하는 것은 다음날 한라산을 생각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었으나, 하얀 멸치와 생 청양고추가 들어간 제주식 멸추김밥을 먹게 될 줄이야. 7시까지 문을 연다는 해동 집은 6시 20분 영업을 종료한 상태였고 거북이 등껍질보다 최소 10배는 무거울 것 같은 배낭을 메고 울 것 같은 얼굴로 13분 후 숙소행 환승 버스에 올랐다.
아 인생 진짜, 알 수 없어.
아 인생 진짜, 배고파.
아침부터 오후 7시까지 먹은 건 계란 두 알, 오예스 하나. 숙소를 찾아 들어가는 길에 한라산에서 먹을 라면 하나를 사서 들어오니 어쩐지 헛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내일 6시 18분 성판악행 첫차를 타야 했고 게스트하우스 조식이 7시부터였기에 아침도 먹을 수 없단 생각이 들자, 먹이를 찾아 들판을 헤매는 하이에나의 심정으로 이곳저곳 기웃거린 끝에 당도 50, 블랙펄을 추가한 공차 아이스 망고티와 김밥천국의 김밥 한 줄을 우걱우걱 배 속에 넣고 도미토리 첫 숙소의 일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일 채비를 하고 있는데 인테리어 사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랫집에 똑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화장실 환풍구 쪽 누수가 발견되어 해결했고 아랫집 사모님이 너무 걱정하시길래 방수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라고 안심시켜 드리고 닦아드렸다고 하시길래 거듭 감사하다고 했다. 아주머니가 또 예전 얘길 하신 모양인지, 이전에 발생한 누수 얘기가 또 나왔는데 이사 와서 6개월쯤 되었을 때, 이전과 마찬가지로 환풍구에서 물이 똑똑 떨어진다며 새벽같이 집에 찾아오셔서 알게 된 무서운 ’ 누수’ (우리 집 배관이 그 모양이라니) 전에 살던 집에서 배관 수리한 지 1년 정도 되었다며 실리콘 부만 다시 정리해서 A/S 차원으로 받았고 수리를 위한 돈을 지불한 적은 없다고 사장님께 말씀드리고 약간의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사장님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추가로 급결방수 서비스로 부분 진행 한 번 더 하셨다고 했다. 인테리어 업체를 끼고 수리하면 이 부분이 참 좋구나! (인테리어 무경험자) 감탄했고, 곧이어 동생이 보내준 사진을 보고 잠깐의 통화를 마친 후 선잠에 들었다.
10월 말의 제주는 내가 사는 곳보다 가끔 춥고 덥고 또또 더웠다. 제주에 오기 전부터 으슬으슬 춥고 목이 아프더니 감기가 이런 때 도착했는지 코를 훌쩍이며 숙소에 배낭을 맡겨둔 채 첫차에 몸을 실었고 사전 예약 체크인 후 7시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산바람이 알싸하게 코를 때리는 생생함, 나무 계단과 디딤돌들을 하나하나 밟으며 허벅지와 엉덩이에 힘이 가해지는 순간, 종아리의 뻐근함과 차오르는 숨 곁으로 빛을 받은 나무에 윤기가 더해졌다.
대피소를 스쳐 처음 도착한 곳은 사라오름이었다. 사라오름의 명칭 유래는 <사라’는 우리나라 산 이름에 표기되는 ‘술’에서 파생되었으며, 신성한 산이나 지역을 의미한다. 또한 ‘사라’는 불교적인 의미로는 ‘깨달음’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제주의 지명에는 불교적 영향을 받아 범어가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제주의 오름 중 가장 높고, 한라산 등산로 중 성판악을 통해서만 진입이 가능한 오름이다. 오름 길은 나무 계단으로 이어져 있는데 계단의 폭이 낮아 올라갈 때는 힘들고, 내려올 땐 가파르게 느껴져 그게 또 쉽지 않게 느껴진다. 그런 계단을 쉴 새 없이 올라 도착했을 때, 산정 호수는 말라 있었고 거뭇거뭇한 돌들만이 그곳에 호수가 있었음을 짐작게 했다. 너무 더운 나머지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입고 있던 플리스 재질의 티셔츠를 벗어 가방에 넣고도 산행하는 내내 바람막이를 입었다 벗었다 반복하며 한라산 정상에 도착했다. 길게 줄 선 행렬은 한라산 표지석에서 기념 촬영을 하기 위한 사람들이었기에 반대편으로 이동하여 정상 사진을 몇 장 찍고 난 후 적당한 자리를 찾아 딱딱한 등산화를 벗어 발을 조물조물 주물러 주고, 숨을 크게 쉰 후 ’ 정상라면‘을 준비했다.
그날의 한라산은 오랜만이라 좋긴 한데 종아리와 발가락이 아팠고, 콧물이 흐르고, 기침할 때마다 목구멍에서는 쇠 맛이 느껴졌다. 열이 나는 통에 괴로움이 동반된 산행이었다. 날씨는 너무너무 좋아서 삼대가 덕을 쌓았을 리가 없는데도 정상만 몇 번을 본 건지 참으로 미스터리했으며, 내가 꿈꾼 상고대는 정말이지 꿈으로 그쳤다.
나는 아무래도 날 맑은 한라보다 운무가 짙게 드리워진 한라를 더욱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발가락에 피가 몰리는 기분, 무릎이 꺾이고,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리는 몸의 감각을 오롯이 느끼며 코를 풀고, 먹고, 눈물을 흘리고, 재채기하며 터덜터덜 왕복 8시간 산행을 마치고 도두행 버스에 기대어 제주에서 진짜 내가 원하고 바라던 첫 끼 전복뚝배기를 마주했을 때의 눈물겨움이란
아, 인생 진짜야.
아, 인생 맛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