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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복 있는 사람

by 쓰는 사람 효주

다정했던 사람. 고마웠던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까칠했기 때문에 방정맞고 성깔이 고약한 편이라서 그런 따뜻한 마음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다고 여기며 김혼비의 <다정소감>를 씩씩 거리며 읽었다. 인복이 많은 사람이네. 좋겠네. 왜 내 삶엔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 주지 않았던 거야! 란 조금은 애통한 쓰라림을 느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고 있자니, 위로를 담당하는 마음이 소멸해 갔던 기억을 복기시킨다. 그리고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와 잊고 있던 사람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짝꿍은 깔끔하고 공부도 잘하는 엄친아 같은 녀석이었다. 부모님의 사랑만 잔뜩 받은 녀석인지라 공감능력이 다소 부족했던, 잘난 체에 조금은 이기적인 놈이었는데, 짝 맞은 양발이 없어 모양도 색깔도 다른 짝짝이 양말을 신고 갔던 날(하지만 약간 비슷해서 바로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녀석이 본색을 드러내며 나를 반 아이들의 놀림감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필 그날 양말을 찾느라 실내화까지 놓고 와 양말만 신은 체 수업을 받아야 했으니, 여간 속상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당장에 내 양말을 알아볼 거라 여기진 않았다. 서 있을 땐 바지 속에 가려져 별로 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의자에 앉으면 올라간 바지 때문에 짝짝이 양말이 훤히 드러났던 모양이다. 쉬는 시간 짝꿍 녀석은 그걸 놓치지 않고 단번에 알아차렸고, 교실에 있던 모든 아이들이 다 들리도록 웃겨 죽겠다는 듯 큰 소리로 짝짝이 양말을 신고 왔다고 동네방네 떠드는 게 아닌가? 몇 명의 아이들이 확인하겠다며 우르르 몰려와 책상 밑으로 부끄럽게 놓인 내 두 발을 쳐다보며 웃었다. 쓰다 보니, 이건 웃음소리 때문에 받았던 모욕보다 더 한 일인 듯 싶다.


많은 아이들이 웃어대니, 언제나 당당했던 나는 움츠러들었고 그대로 엎드려 엉엉 울고 말았다. 짝 맞는 양말도 없는 내 처지가 싫기도 했고 모든 아이들에게 비웃음 거리가 된 것 같아 비참한 기분마저 들었던 거다. 수업이 시작되었어도 눈물이 그치지 않아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마침 담임 선생님의 수업시간이었고 선생님은 들어오자마자 엎드려 울고 있는 나의 상황을 물으셨다. 짝짝이 양말 사건의 전말을 들으시고 짝꿍의 양쪽 볼을 두 손으로 꼭 집으시고 몇 번 주물러 주시며 그런 걸로 친구를 놀리면 쓰겠냐고 야단을 쳐 주셨다. 녀석은 평소 찔러서 피도 안 나올 것 같았던 내가 닭똥 같은 눈물을 쏟으니 놀랐는지, 수업이 끝난 후엔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다. 그렇게 잊힌 사건이었는데 선생님은 그 일을 마음에 담에 두셨던 것 같다.


추석 연휴를 앞둔 마지막 날, 집에 돌아와 쉬고 있는데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나가보니 몇몇 임원 아이들이 선생님이 너 찾으신다고 학교에 빨리 가보라고 전해 줬다. (연휴 전 마지막 날이라 임원들은 다른 임무가 있어 늦게 끝났던 것 같다.) 잘못한 건 분명히 없고, 무슨 일일지 궁금한 마음에 전속력으로 달려가 선생님을 만났다. 중앙 현관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선생님은 하얀 쇼핑백을 건네어주시며 이거 주려고 했다고 말씀하셨다. 어색하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거다. 쇼핑백에 들어 있던 건 양말이었다.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아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생각해서 전해주는 마음을 양말이라는 형태로 받은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최초의 경험들은 언제나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그것이 양말보다 더 작은 것이었을지라도 그랬으리라. 뽀얗고 햐안 양말이었는지 색색이 알록달록한 양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에 남는 건 양말이 전해준 선생님의 다정한 마음이었고,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나를 키워냈다고 생각한다. 무섭고 싸늘하기만 한 세상에 부드럽고 따뜻한 입김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기억을 더 깊이 더듬어 보자, 언제나 배꼽 빠지게 웃게 해 준 4학년 때 친구 윤아와 첫 세례를 받은 나를 따뜻하게 챙겨주셨던 본당신부님, 세상에 둘도 없는 맛있는 치즈라면을 끓여주었던 아주머니, 밤길을 걸으며 세상 모든 이야기를 함께 나눴던 만화가 영숙언니, 빨간 머리 앤을 닮았다고 말해줘 나를 날아오르게 한 애정이.. 그리고 지금 곁에 있는 다정한 사람들. 모나고 거칠었어도 나를 스쳐갔던 사람들이 남긴 다정한 흔적들 덕에 조금씩 더 둥글둥글해지는 중이다. 혼자 큰 줄 알았더니 아니었네. 다정한 사람들의 전해준 마음 덕에 이만큼 클 수 있었구나.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했지. 그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선 그 마을 사람의 열 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덕에 저마다 어른으로 노인으로 늙어갈 수 있음을 기억해 두자.


주저앉고 싶은 순간마다 "내가 무능력했지 무기력하기까지 할까 봐!"라고 덮어놓고 큰소리칠 수 있었던 것도 내 안에 새겨진 다정들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게 붙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패턴을 반복해서 얻게 되는 건 근육만이 아니었다. 다정한 패턴은 마음의 악력도 만든다. <다정소감, 김혼비>


그렇게 만들어진 내 마음의 악력이 이렇게 단단한 걸 보면, 나 역시 작가 못지않은 다정을 반복해서 받아왔음이 분명해 보인다. 인복이 있었던 거다 나에게도!! 암~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나에겐 인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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