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밤 / 은유

독서로 보내는 편지

by 쓰는 사람 효주

멀고도 먼 이란에서 전쟁 중이다. 평생 만날 일도 볼일도 없는 미국 대통령이 갑작스레 일으킨 전쟁은 대한민국 지방 소도시에서 유통업으로 근근이 생활하는 사람의 삶마저 흔들어 놓는다. 기름값이 뛰자 사람들은 가장 먼저 여행을 내려놓았다. 관광객이 와야지만 매출이 늘어나는 곳에선 치명타다. 금요일 오전에 진열해 둔 제품들은 월요일 오전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빈자리가 없어 채워 넣어야 할 물건을 그대로 가져오고, 날짜가 다 된 제품들을 수거해 왔다. 전쟁을 남의 나라 일이라 치부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긴밀하고 촘촘하게 연결된 삶을 살고 있다. 말릴 수 없는 고집불통의 독불장군 한 명이 시골마을의 마트와 유통업계의 생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늘어 나는 한숨과 걱정을 마음 한편에 모셔두고 독서를 이어갔다. 책과 책을 연결해 주는 은유작가의 <해방의 밤>을 읽으며 사라지는 시간 동안 내게 놓인 문제를 조금 멀리 떨어져 볼 수 있었다. 그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미사일은 없으니까. 당장 생계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까. 사소한 걱정으로 마음을 채우고 있었구나 하는 반성도 함께 하며.


책을 통해 성장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품는다. 책을 덜 읽었던 나와 많이 읽고 있는 지금의 나는 과연 달라졌는가를 살펴보면,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실수투성이고, 질투도 많고, 어른스럽지 못하고 잘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요리도 못하고, 인성도 바르지 않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은유작가의 <해방의 밤>을 읽다 보니, 이 사람을 성장시킨 건 책이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책을 통해 자신의 구겨진 마음을 필 수 있었다는 고백은 진실해 보인다. 여성의 인권과 사회적 약자들이 받아야 했던 고통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필요한 책을 알고 있었다. 아프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책들을 추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숱한 밤, 책을 읽으며 자신을 지켜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책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나의 독서는 어때야 하는 가를 고민하게 만든 책이기도 했다. 독서를 돕는 책이자 독서를 성장시키는 책.


보아햐니 은유작가는 버지니아 울프와 레베카 솔닛을 좋아했다. 그녀들의 책을 여러 권 소개해 준 걸 보면 틀림없어 보인다. 버지니아 울프가 쓴 <세월>을 1년 가까이 붙잡고 있었던 적이 있다.(까마득히 먼 20대 시절이다) 괜히 멋져 보이고 싶어 읽기보다는 들고 다닌 시간이 더 길다. 이해하는 독서가 아닌 끈기의 독서였을 뿐이라 책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었다는 성취감은 챙겨두었다. 레베카의 <걷기 예찬>은 꽤 최근에 읽었다. 역시 쉽게 읽진 못했지만, 그녀의 문장들이 좋았고 느리게 읽기를 통해 이해의 독서를 하려고 나름 애를 썼다. <걷기 예찬> 속 한 문장을 소개해준 책을 만났을 땐, 역시나 내 독서는 허당이었구나 했지만 말이다. 그 책에 그런 문장이 있었어? 왜 그걸 놓쳤을까? 도통 생각이 안 난단 말이지. 독서의 아쉬움은 늘 그렇게 찾아와 나를 꾸짖는다.

아, 독서를 잘하는 사람들이 부럽단 말이지.


즐거운 숙제처럼 써내러 간 책 목록들이 독서기록장에 그대로 남아 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가장 먼저 읽어보려고 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라는 그의 책 읽기가 궁금하다. 지식의 세계로 빠져들어 뜻하지 않게 현자가 된 그의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도대체 어떤 독서를 해야 그 경지에 이르는 걸까? 독서의 샘물이 말라버릴 때가 있다. 어떤 책에도 시큰둥하고 뭘 읽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으로 권태기에 빠지는 시기 말이다. 매번 읽었던 비슷한 책들 말고 머리를 꽝 쳐줄 도끼 같은 책을 만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먼저 읽어낸 사람들의 글을 찾아본다. 작가들의 독서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잃어버렸던 내 길이 다시 보이기도 하고, 새롭게 찾아낸 틈새길로 잠시 다른 풍경을 감상하기도 한다. 그러면 마음은 즐거워지고 독서는 나날이 깊어진다. 특히 좋아하는 작가의 추천 도서가 가득한 책은 숨겨진 보물이 가득하다. 그 사람을 성장시켜 준 만큼 나를 성장시켜 줄지는 미지수지만, 신나게 읽을 수 있는 책임에는 틀림없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자기 생각에 빠져 앞이 안 보이는 딱 한 사람. 그 사람에게 필요한 건 역시나 책이 아닐까 싶다. 내가 그의 측근이라면 <손자병법>을 권해주고 싶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