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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은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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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이 있는 일상 Nov 10. 2023

바퀴벌레가 주고 간 마음

벌레라면 작은 녀석이든 큰 녀석이든 가리지 않고 기겁하는 친구가 있다.  일 년에 한 번씩 만나 둘만의 시간을 갖는 청양의 고운 식물원에서도 그랬다. 생각보다 맑은 날씨 덕에 우리는 입고 온 외투를 벗어야 했고, 작은 날개로 힘껏 날아오르던 벌레들과 조우해야 했다. 눈앞에 하루살이보다는 조금 크고 파리보다는 작은 날개 달린 녀석이 돌진해 오자 친구는 겁 많은 사자처럼 으르렁 거렸다. 나는 그녀의 등 뒤에 서서 풋하고 웃어주었다. 벌레에 비하면 산만한 그녀가 그 조그마한 벌레를 피해 몸을 숙이고 머리를 털고 공포의 포효까지 내뱉다니. 벌레 입장에서 본다면 참 한심할 노릇일 테다. 벌레를 무서워하는 마음은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손으로 때려잡지 못하는 그녀의 선한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3년 전 코로나가 터졌을 때 오래된 아파트를 리모델링해서 이사를 갔던 그녀의 집을 2년이 지난 작년 8월에 집들이 겸 방문했었다. 온 가족을 데리고 하룻밤 그녀의 새집을 펜션 삼아 놀러 갔다고 봐야 더 옳겠지만, 어찌 됐든 명목상엔 집들이었다. 새 아파트처럼 완벽하게 꾸민 그녀의 집은 단정함과 깨끗함 그 자체였는데 특히나 화장실은 바로 전날 새로 바꾼 것처럼 희고 눈부셔서 우리 가족 모두 곳에서 볼일을 봐도 되는 건지 의심했다. 무엇하나 더럽혀서는 안 될 것 같은 그녀의 화장실에 놀라 삐죽삐죽 어색하게 걸어 나와 마치 내 몸속의 더러운 것을 거기에 묻혀 놓은 죄책감을 품어야 했다. 그런데  그녀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요사이 바퀴벌레가 집안 여기저기서 출몰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첫째가  늦은 밤 1시 혹은 2시까지 잠들지 않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다 화장실 불을 켰을 때 비밀스레 오고 가던 바퀴벌레가 떡하니 발각되었다. 맨 처음 발각된 녀석 작은 녀석이라 강단 있던 큰애는 휴지를 돌돌 말아 단숨에 녀석을 제압했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 후 첫 번째 녀석보다 두 배이상 큰 녀석이 발각되었을 땐 놀란 마음에 엄마를 불렀다고 한다. 잠결에 놀란 친구는  딸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고 그곳에는 도저히 제압이 불가능할 정도로 커다란 바퀴벌레가 가만히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멈춰서 있었다고 한다.


벌레라면 파리도 잡지 못하는 친구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벌벌거렸고, 엄마대신 용기를 내어 그 큰 녀석을 제압하기로 나선 첫째는 휴지를 가득 말아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갔지만 차마 손을 뻗어 그 녀석을 잡지 못했다고 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니 두 사람은 화장실 앞에서 어찌해야 할지 르는 보초병처럼 서성였다.  가족 중에 벌레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남편은 하필  그날 워크숍으로  공석이었다. 남편이 있었다면, 아빠가 있었다면 저 큰 녀석도 단숨에 끝장낼 수 있었을 텐데. 갑자기 남편이, 아빠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던 두 사람은 그제야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깨달았다고 한다. 징그러운 바퀴벌레 덕에  결혼 16년 만에 남편의 소중함을 깨달은 친구와  태어난 지 15년 만에 아빠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은 딸은 " 오늘따라 남편이(아빠가) 너무 보고 싶네" 하며 그리움을 마음 한자리에 어 두었다.


녀석이 나타난 이유가 다 있었던 거다. 미물도 존재의 이유가 있다고 했는데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그날 밤 친구네 희고 반짝이던 화장실에 홀연히 나타났던 바퀴벌레는 친구와 딸의 마음에 그리움 하나를 전해주고 변기 밑 보이지 않는 틈새사이로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다음 날 친구는 집안 곳곳에 바퀴벌레 퇴치약을 놓았고, 나는  화장실에 난 작은 틈새사이에 락스와 세제를 발라 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당분간 바퀴벌레는 비밀기지에서 나오기 어렵게 됐다. 그런데 어쩌면 친구와 딸의 마음에 전해줄 마음이 또 생긴다면 그  녀석은 언제든 또 나타날지도 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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