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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레국화 Feb 20. 2024

무지의 역설

유시민,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과학 공부가 그런 맛이 있는 줄은 몰랐다. (...) 나는 여러 면에서 달라졌다. 내 자신을 귀하게 여긴다.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워졌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 덜 무섭다. (...) 오래 알았던 역사이론에 대한 평가를 바꾸었고,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책을 쓴 철학자를 존경하게 되었다(p.8-9).


50대에 이르러 시작한 과학 공부는 작가 유시민에게 새로운 ‘맛’을 선사했다. 그 덕에 바보를 겨우 면했다고, 스무 살에 과학을 알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그는 고백한다. 그의 근작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돌베개, 2023)다.


이 책의 근간은 저자가 읽어온 과학책들이다. 그는 『파인만!』(리처드 필립 파인만 지음, 김희봉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8) 등의 책을 시작으로 과학서 읽기를 지속한다. 또한 2021년부터 그가 진행해 온 유튜브 도서 비평 방송 《알릴레오 북스》를 통해 『침묵의 봄』(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에코리브르, 2011)과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을유문화사, 2018) 등의 과학서로 전문가들과 대담을 진행하였다.


저자는 비전공자에게도 친화적인 과학 도서 읽기를 제안한다. 그는 ‘과알못’ 독자들을 위해 통상의 읽기 방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과학서들을 재구성하였다. 책의 목차는 이에 따른 것이다. “뇌과학을 알면 생물학에 호기심이 생긴다. 생명 현상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싶으면 화학을 들여다보게 된다. 원소 주기율표를 이해하려다 보면 양자역학과 친해진다. 양자역학을 알면 우주론이 덤으로 따라온다. 우주와 수학이 무슨 관계인지 궁금해진다(p.290).”

    

과학은 인문학의 전통적 질문들을 이해하는 데 통찰을 준다. 인간의 ‘자유 의지’란 뇌과학에 비추어 보았을 때 허구인가. 다윈주의(Darwinism)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선악과 종교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양자역학으로 본 유물변증법과 마르크스주의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등이 그것이다.


또한 과학은 우리 주변의 사물과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새롭게 한다. 우리 자신과 세계의 물성(物性)을 아는 것. 인간은 유전자의 보존을 위한 생존 기계이며 이 땅의 생명체들은 탄소와 수소 결합이 분자를 이룬 결과라는 사실을 아는 것.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생의 통찰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뉴런은 서로 연결함으로써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내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거꾸로 뉴런의 연결 패턴에 영향을 준다.’ (...) 물질이 아닌 자아가 물질인 뇌를 바꾼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 [나는] 내 뇌의 뉴런이 순조롭게 다양한 연결망을 형성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책을 읽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공감하고 세상과 연대하며 낯선 곳을 여행한다(p.99-100).


이 책은 지성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흔든다. 지성의 척도는 무엇을 얼마나 ‘아는가’가 아니다. 오히려 ‘무지’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의 문제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범한 중대한 과학적 오류들은 그의 지적 권위로 인해 긴 세월 의심받지 않았다. 수학자 앨런 튜링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으로 인해 범죄자 취급을 당하며 약물을 주입받아야만 했다. 앎에 대한 오만이야말로 인류의 지성을 가장 강력하게 반증하는 사례였다.


우리가 그간 쌓아온 앎이 그것과 양상이 다르거나 혹은 심지어 기본 전제를 달리하는 앎과 만나 정(正)과 반(反)으로 놓일 때, 그때 얻을 수 있는 새로운 합(合)과 새로운 지적 기쁨이 있다. 이 책은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이 도움을 주는 이 시대에 함께 그 기쁨을 즐겨보자고 권한다. 4차 산업 혁명과 같은 클리셰로 생존에 대한 독자의 불안을 자극하는 방식이 아니기에 더욱 반갑다.     


무지를 일깨워 새로운 앎으로 나아가게 하는 지적 산파. 이 책에 붙여봄직한 수식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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