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간접적인 경험들
지난번 글이 구글 뉴스 섹션에서 추천으로 뜨는 바람에 갑자기 조회수도 급격히 늘고, 한동안 정체기였던 브런치 구독자 수도 늘게 되었다. 사실 인스타그램이나 기타 다른 SNS 플랫폼에 대비하여 브런치는 자체에서 밀어주는 주제로 글을 쓰지 않는 한, 팬이 갑자기 현격하게 늘기 쉬운 플랫폼은 아니다. (그 원인은 브런치는 아무나 글을 쓸 수는 없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아서 쉽게 가입하지 않는다는 이유가 가장 큰 것 같고, 굳이 쓸 거 아니면 글 읽는데 지장도 없으니 글 하나 맘에 들었다고 가입할 동인도 크지 않아 보인다.) 원래 외국어 이야기를 시리즈로 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새로 굳이 구독까지 해주신 분들을 위한 감사의 마음으로 내친김에 언어 학습에 관한 나의 경험으로 한 편을 더 마무리 지어볼까 한다.
가성비 최고의 외국어 골든 타임
중학교에 가서야 공식적인 영어 수업을 받던 그 시절, 내가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만 해도 외국물을 먹은 친구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꽤나 가까운 주변에서 영어를 원어민처럼 하던 아이들이 있는데, 그 아이들의 공통점은 아빠 주재원 찬스로 1년에서 1년 반 정도씩, 딱 초등학교 '4학년에서 5학년' 정도에 미국에 살다 온 것이었다. 나가기 전 엄청난 조기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던 그들이 바로 현지 학교에 편입되어서 어떻게든 1년 남짓을 버텨내고 돌아온 후에는 원어민과 별 다르지 않게 말하였고, 영어를 본능처럼 문장 역시 고민 없이 척척 잘 만들어내었다. 그들은 후일 전문직이나 예술인이나 이과생이 되어 영어 하나로 먹고사는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영어는 보너스처럼 평생 달고 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어린 아들을 키우고 있지만, 사실 '4학년 정도에 1년 정도만 현지 학교를 갈 수 있기만 하다면', 이 모든 영어 조기 사교육에 목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더 어린 시절 외국에 살다 온 경우에는, 현지에서 배우고 적응하는 속도도 그만큼 빠르지만, 돌아와서 까먹는 속도도 그만큼 빠른 경우가 많았다. 언어에 재능이 있는 편인 친구들은 간혹 유지하기도 하는데, 문제는 외국에 나갔을 당시의 수준의 본능을 유지하고 있다는 얘기들을 하였다. 예를 들어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외국에 살았다면, 잘해도 초등학교 3학년 짜리 수준의 영어 본능을 유지하게 된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정말 예외적인 경우를 딱 한번 살면서 만났다. 우리 팀의 수더분한 남자 팀원이 영국식 악센트를 가지고 상당히 세련된 영어를 구사하길래 당연히 영국에서 오래 살았거니 했더니, 5살 때 딱 1년 홍콩 살아본 것이 전부이고, 자신의 영어는 고향인 안양에서 배운 거라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 이후 한국에서 어머니가 주 1회는 영국인 그룹 과외 선생님을 붙여서 그가 외고에 입학할 때까지 꾸준히 유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고 했다. 그 아이의 영어 본능은 5살 수준으로 시작했지만 꾸준한 학습으로 함께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고등학교 때 유학 갔던 많은 친구들은 영어를 분명 잘하긴 하지만, 대부분 원어민의 본능처럼 한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었다.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이니 당연히 세상에 예외는 많을 것이다.
나이 들어 시작한 외국어를 잘하기 위한 기회
사실 언어를 공부하는 것도 다른 과목을 공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왕도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분야를 하게 되든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한 집중한 '1만 시간' 정도는 투여가 필요하듯이 외국어 역시 그런 인고와 반복 학습과 연습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같은 시간이라도 얼마나 효율적으로 시간을 활용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결과는 당연히 상당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이 들어서 집중적인 언어 습득의 기회를 얻는 방법은 아마 어학연수와 교환 학생 혹은 유학의 케이스가 있을 것이다. 어학연수는 가서도 결국 외국인들끼리 완벽하지 않은 현지어로 떠드는 시간이 많아질 수밖에 없으니 '습득'의 목적보다는 보다 비슷한 수준의 편안한 환경에서 '연습'의 기회가 더 필요한 사람에게는 효율적일 수 있다. 조금 더 노력하여 교환 학생 혹은 현지 유학 기회를 바로 얻는다면, 현지에서 더 제대로 된 살아있는 언어를 '습득'하기에는 너무 좋은 환경이지만, 반면 언어가 부족한 상황에서 주눅이 들거나 수업 내용을 따라가기에도 벅차, 막상 나의 역량만큼 표현해 보는 '연습'의 기회를 더 많이 놓칠 수도 있다. 게다가 현지 학생들과 같은 기준으로 상대 평가라도 받아야 하는 시스템이라면 언어로 고군분투하며 도움을 더 받기 어려울 수도 있다.
나는 고 3 때까지 학교 대표로 경시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이과에 진심인 사람이었다가, 수능 보고 급작스레 불어로 전공을 전향한 사람이었다. (그 점수로 이과에서 원하는 최고의 과를 갈 수는 없을지언정, 언어로는 최고의 과를 갈 수 있었다는 이유였다.) 입학을 해보니 절반 정도는 외고에서 불어를 이미 전공했거나, 해외 주재원 자녀여서 어린 시절부터 이미 몇 개 국어를 하는 친구들이었다. 이 친구들을 제치고 단 한 두 명 갈 수 있는 교환학생 티켓을 따내는 방법은 죽어라 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음악을 들으며 여유를 부리거나, TV를 보면서 늘어지는 사치는 대학생이 되었건만 내겐 여전히 없는 선택지였다. 동기들이 모여서 요즘 유행 이야기를 하다가도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면서 "아 맞다, 얘는 TV 안보는 애였지." 하기 일쑤였다. 눈뜨면 제일 먼저 불어 방송을 틀어두고, 자기 전에는 머리 옆에 불어 테이프를 틀어놓고 잠들었다. 그렇게 생활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꿈도 불어로 꾸는 날이 종종 있었다. 그렇게 두 번 교환학생 시험에 떨어지고, 파리 4 대학 소르본느 교환 협정이 맺어지던 첫 해, 1기로 선발되어 난생 첫 해외 생활 경험을 하는 기회를 얻었다.
외국어로 현지에서 살아남는다는 것
그렇게 꿈까지 불어로 꿀 정도로 한 2년 올인해서 열심히 했건만, 으리으리한 소르본느 대학의 유서 깊은 프렌치 강의 스타일은 내가 도저히 적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온갖 판서와 화려한 PPT, 엄청난 교재로 무장된 한국 대학 강의에 익숙해진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몇 세기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 강당에서 노교수가 잘 들리지도 않는데 혼자서 중얼중얼 그렇게 한 시간을 떠들다 나간다. 판서도, 교재도, 아무것도 없었다. '불어를 배우는' 게 아니라 '불어로 언어학' 수업이 끝났는데 나는 단 하나도 건진 것이 없었다. 나는 그때 "헬렌켈러 체험을 하러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했다. 귀가 있으나 들을 수 없고, 입이 있으나 말할 수 없었다. 눈이 있어도 보고 쓸 것도 없었다. 옆의 프랑스 애한테 필기 좀 빌릴 수 있겠냐고 했더니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알고 보니 완전한 상대 평가였고, 그곳은 엄청나게 평가에 박했다.) 어쩌다 착한 애 만나서 노트 몇 번 빌리게 되면, 프렌치 필기체는 또다시 암호학을 전공해야만 이해할 수준이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든 수업을 녹음해서 밤마다 동이 틀 때까지 돌려서 듣고, 들릴 때까지 계속 다시 듣고, 그것을 하나씩 다 받아 적는 것뿐이었다. 주중에는 그렇게 수업을 소화하느라, 주말에는 이태리, 스페인에서 교환학생 온 친구들과 파리 뒷골목을 쏘다니고 춤을 추느라 밤을 새웠다. 주중에는 '습득' 모드였다면, 주말에는 수준 비슷한 외국 친구들과 '연습' 모드였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가을을 보내고 겨울인 내 생일 즈음에는 일주일간 완전히 몸살로 드러누울 정도로 한 학기 온 열정을 불태웠었다. 엄청난 자괴감을 매 수업마다 느끼며 언어 장애인인 느낌으로 겨우겨우 따라가고 있었는데, 의외로 한 학기 나의 성적표 결과는 전 과목 상위 10% 이내 수준을 받아서 놀라기도 하였다. 이후 나는 현지에서 직접 인턴십을 구해서 풀타임으로 워크캠프 NGO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첫날부터 전화를 받으라고 하는데 너무 당황스러웠다. 각지에서 각 지역의 악센트로, 그것도 전화를 넘어서 들리는 소리는 또 완전히 다른 외국어처럼 들렸다. (또다시 자괴감 타임..) 그런데 한 두 달 지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Concordia (일하던 기관 이름), Bonjour!"하면서 경쾌하게 전화를 받고, 능숙하게 고객들을 상담해주고 있는 것이 스스로 참 신기했다. 아마도 그렇게 불어가 내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나 보다.
그러고 한국에 돌아와서 졸업을 하고 취직을 했다. 이후 취업을 하게 된 곳들은 아쉽게도 불어를 쓸 일이 전혀 없어 그렇게 20년 동안 내게 불어는 거의 잊힌 존재였다. 하지만 나는 중간에 가끔씩 불어를 쓸 수 있는 상황이 보이면 달려 나갔는데, 너무도 신기하게 파리에서의 내 불어가 세월과 함께 조금씩 증발한 게 아니라 몸 어딘가에는 박혀 그대로 계속 들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친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어보는데,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아마도 몸에 인이 박인 것처럼, 그냥 쉽게 날아갈 수 있는 게 아니었나 봐."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엄밀히 말하면, 나는 지금 예전 불어를 최고로 잘하던 때만큼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때도 나는 '원어민처럼 완벽하게‘ 한 적은 원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지금도 중간중간 버벅대거나 막히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이 정도라도 불어로 여전히 의사소통 할 수 있고, 프랑스 사람들과 빠르게 친해질 수 있음에 감사한다.
제목을 거창하게 뽑았지만, 사실 내가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으로서의 비법을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외국어를 잘하고 싶은 사람들이 현지에서 언어를 더 잘 습득할 수 있는 기회'의 종류이고, 일부 나의 직간접 경험으로 그 기회들에 대해서 어떤 것인지 엿볼 수 있었으면 했다.
어린 자식을 기준으로 고민하는 입장이라면, 그 어떤 방법론보다 '골든 타임'을 한번 고려해 보면 최고의 가성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조금 더 나이가 들어 외국을 나갈 기회가 있다면 스스로의 멘탈을 잘 판단해 보고 강한 쪽이면 교환학생이나 유학과 같은 인텐시브 한 방법을, 아니라면 우선 언어 연수로 조금은 더 편안한 환경에서 노출되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개인적인 경험을 일부 공유했지만, 교환학생과 유학의 방법으로 언어'도' 같이 배워야 하는 상황이면, 어쩌면 그 무엇보다도 ‘엄청난 자괴감’을 맞이할 각오가 가장 필요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내가 이후 더 나이 들어서 유학을 갔을 때에도, 명문 아이비리그의 대학교들에서도 정신 상담을 오는 학생들이 그렇게나 많다고 하였고, 교내 관련 서포트 시스템도 정말 잘 갖추어져 있었다. 핸디캡이 없는 현지인들도 해내기에 부담을 느끼는 학과 과정을, 언어라는 엄청난 핸디캡을 지고 시작한다는 것, 정말 보통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 핸디캡을 어떻게든 이겨내고 나온 사람에게는 아마도 뼛속 깊이 인이 박이는 무언가가 남기는 할 것이다. 나에게 현지에서 1년 살았던 그 언어가 20년 지나도록 묻혀있어도 여전히 필요할 땐 어디선가 불쑥불쑥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