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할아버지를 추모하며
우리 아이가 기특히 모락모락 커가는 삶의 기쁨을 주는 사이에, 반대편 한편으로는 내가 직간접적인 은혜를 많이 입었던 어르신들이 노쇠해가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알고는 있지만 어리석게도 대부분의 시간을 전자의 기쁨을 누리는 데에 에너지를 집중한다. 존경하는 한 분의 어르신이 운명하셨다. 이제 그런 분들이 점점 더 남아계시지 않다는 사실이, 이런 자리에서나 뵙게 되는 여러 어르신들이 뵐 때마다 눈에 띄게 연로해 가신다는 사실이 슬프다.
< 우리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 >
우리 할아버지는 9남매 중 장손이자 종손이었고, 이번에 돌아가신 작은할아버지는 1935년생 막내로 20 여살 가까이 차이 났으니 거의 아들뻘에 가까웠다. 우리 할아버지는 당시 양산의 어느 깡시골에서 컴컴해지도록 호랑이가 나올지도 모르는 산을 넘어야만 다닐 수 있는 중학교에 매일 그렇게 이를 악물고 다니셨다고 한다. 그 정도로 학업에 대한 진심과 열망이 있었으나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중학교까지가 최선이었다. 다른 형제들에게는 대부분 그마저도 주어지지 않았던 기회였다.
종손으로서 일찌감치 농사일에 참여하셔서 동네에서 손꼽히는 근면함으로 땅을 한 뙈기씩 넓혀가시는 와중에 그중에도 가장 총명했던 막내를 위해서 당시 가진 재산의 아주 큰 부분이었던 소를 팔아 멀리 고등학교까지 보내주셨다고 한다. 그 작은할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을 하자마자 시험을 봐 경찰이 되셨고, 그 와중에 주경야독 야간대학으로 경찰학과 학위를 따시고 이후 청와대까지 근무하셔서 시골에서 친척들이 올라올 때마다 서울 투어를 담당하셨다고 한다. 서울에 올 일이 있는 친척이었다면 아마 작은할아버지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분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주어진 환경의 부족한 자원의 분배를 함에 있어서 형제 중에서도 가장 총명했던 작은할아버지에게 집중 투자하셨던 것처럼, 자신의 6남매 자식들 중 둘째 아들에 불과했던 우리 아빠의 가능성을 보고 가업인 농사일을 면제해 주고 대신 학업에 전념하도록 전폭 밀어주셨던 것 같다. 유일하게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식인 아빠가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할아버지 손을 잡고 서울 구경을 몇 번이나 왔더랬다. 아마 그때마다 서울에서 자리 잡고 있는 유일한 형제인 작은할아버지가 많은 힘이 되었을 것이다.
< 할아버지와 아빠 >
당시 할아버지는 아빠가 중학생 되던 시절부터 양산을 벗어나 부산으로 유학(?)을 보내 친척집, 친구집, 고모집을 전전시키며 할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공부환경을 제공해 주고자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아빠는 어린 시절부터 남의 집 눈칫밥 신세를 지느라 실컷 먹고 자라지 못해서인지 잔병치레가 많았고, 그 시절 사진에는 갈비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비쩍 말라있었다. 이후 허약한 아빠의 군대를 면제받게 도와준 사람에게 너무 고마워서 할아버지는 쌀 한 가마니를 그 길로 짊어지고 오셔서 보답을 하였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역사는 많은 부분 땅에 같이 묻혀버리게 되어 안타까운 점이 많다. 식민 통치 시기에 용감하게 일본으로 건너가 군수물자 유통 수요가 급등하던 시기 트럭 운전수로 돈을 상당히 모았다고 했다. 그 돈을 다다미 바닥에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하고 폭격을 맞아 모든 것이 재로 변한 것은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는 유산도하시고, 그 사이에 무슨 끔찍한 일을 더 겪었는지 모르지만 할아버지는 한국에 돌아온 후 다시는 평생 운전을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농사에 필수요, 엄청난 운전 기술이 필요로 하지도 않는 경운기마저도 운전하는 것을 거부하셨다고 하는데, 아빠는 도대체 어떤 일을 겪었는지 평생 궁금했으나 끝내 듣지 못했다고 한다.
< 그들이 남긴 사랑 >
그 길로 무일푼으로 돌아와 다시 맨손으로 농사를 시작하여 한 땀 한 땀 부를 축적하는 그 과정이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에게 너무도 고되었을 것이다. (유산을 포함해) 최소 7번 이상의 출산을 하고도 몸조리는커녕 바로 다음날 다시 밭을 매고 농사를 지으러 가는 그 삶을 살면서 자궁과 허리가 성할리 없었고, 제대로 병원 치료도 못 받고 수시로 배가 아파서였는지, 허리를 들 새도 없이 너무 노동을 심하게 해서인지 할머니는 허리를 점점 펴지 못하여 그야말로 꼽추처럼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다. 할머니의 4-50대 사진의 모습은 이미 요즘 할머니의 8-90대 모습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먹고살기 힘든 와중에도 소 팔아 동생을 공부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 시절 우리 할아버지가 남겨주셨던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여보 우리 다음 생에서 꼭 다시 만나요. 그때는 내가 더 잘해드릴게. 사랑해요. 엉엉“ 작은할머니가 입관식 때 오열했다. 91세 나이에 세상을 하직할 때 배우자에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삶이 얼마나 될까? 작은할아버지는 그 시절 명문 경북여고를 졸업했을 정도로 똑똑했지만 가난했던 작은 할머니와 당시 결혼하시면서 그 집안까지 다 책임졌다고 했다. 심지어 상당히 오랜 기간 장모를 모시고 살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나는 그전까지 그분을 평생 만나본 적도 없는 채 온 식구가 맨 처음 상경할 당시, 선뜻 집 한켠을 내어 주셔서 삼십여 평 그 다섯 식구 사는 집에 우리 다섯 식구가 상당히 얹혀 지낸 적도 있고, 내가 평생 받아본 적 없는 액수의 용돈도 모두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던 작은할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그가 작은할머니, 그리고 심지어 우리에게까지 남긴 것 역시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작은할아버지는 늘 마음속 어딘가 나의 모든 핏줄 중에 손꼽는 멋진 어른, 존경스러운 분으로 든든하게 한 켠을 자리하고 계셨었다. 그분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자리를 차지하시고 계시겠지만, 이제 같은 세상에서 숨을 쉬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한다.
작은할아버지, 너무도 감사했어요. 베풀어주신 사랑과 보여주신 존경스러운 모습들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평안히 영면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