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없이 맑은 너의 눈을 보며
인생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참 많았지만, 사실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큰 로망이나 미련이 있진 않았다. 하지만 모든 세상 일이 그렇듯, 나 혼자만의 생각대로 고대로 흘러가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여태 살면서 다른 모든 것들에서 그리했듯이, 나도 부모가 되어보기로 결심한 이상 어쩌면 과도할 정도로 열심히 준비하였고, 그 결실로 감사하게도 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티 없이 맑은 눈으로 초롱초롱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을 보며 생각해 본 단상들.
#. 크게 바라는 것 없이 태어난 너의 순수를 최대한 오래 지켜줄게 #
신생아는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걸친 것 없이 세상에 빈손으로 오게 되었다. 그 작은 생명에게 필요한 것은 체온을 지켜줄 면포 한 장, 그리고 고픈 배를 채워줄, 한 번에 몇십 미리 리터면 충분한 젖줄이다. 딱 그 정도면 한없이 평온하게 잠들게도 바로 흐뭇하게 미소 짓게도 만들어 줄 수 있다.
이 아이는 대체 무얼 믿고 세상에 나오게 되었을까. 아기는 바라는 것도, 필요한 것도 많지 않다. 어른들이 아이에게 바라는 '본인 자신의' 무한한 욕망과 비틀린 기대로 인해 이 아이의 단순하고 맑은 순수가 커가면서 최대한 오래도록 훼손되지 않도록 바라본다.
# 세상의 잣대가 아닌, 하나의 개별 인간으로서 너의 속도를 지켜봐 줄게 #
아기는 부모라는 사람을 이 험난한 세상의 길잡이처럼 모든 것을 보여주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아기는 다른 집 부모들이 어떤 지 알 수도 없으니 비교할 리도 없고, 이상적인 부모의 모습이 어떠할 지도 전혀 기대하는 바 없이, 꽤 한동안은 내가 보여주는 세상 그대로가 본인이 아는 세상 모습의 전부일 것이다.
그러니 더욱 좋은 모범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나 역시 혹여나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 혹은 세상이 이미 결론 내어놓은 평균치 숫자들과 대비하여 때로 조금 빠르다고 우쭐하거나, 조금 느리다고 조급해하지 않고 그냥 독립된 한 개별 인간의 성장곡선을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고 싶다.
# 네가 소중할수록 더욱 다른 것들과의 밸런스를 잃지 않도록 할게 #
과도한 사랑이 집착이나 일방적인 희생으로 변질되어, 주는 사람에게도 받는 사람에게도 결과적으로 독이 되는 관계를 많이 본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식에 대한 집착은 유난하기까지 하여,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너를 위해 다 희생했는데, 넌 왜 겨우 이 모양이냐"는 것은 뻔한 극성 부모들의 레퍼토리인데, 아이의 입장에서는 사실 황당한 이야기이다.
아이는 부모에게 희생을 강요한 적도 없고, 그런 과도한 기대나 부담을 본인에게 지울 바에는 그냥 부모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은 채 행복하고 심적으로 여유로운 마음으로 자식을 대해주는 것을 훨씬 더 원할 것이다. 집에서도 항상 아이만이 대화의 주제가 아니라 배우자의 오늘 하루는 어떠했는지, 연로해 가는 부모님의 요즘 근심 걱정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진심으로 살필 줄도 아는 밸런스 있는 삶에서 너를 자연스럽고 부담스럽지 않은, 동등한 비중을 가진 일개 구성원으로 초대하고 싶다.
# 나 하나 믿고 이 세상에 나와 그저 의지하던 너의 모습을 오래 기억할게 #
언젠가 이 아이도 나보다 덩치가 큰 청년이 될 것이고, 언젠가는 나 정도의 나이도 되고, 더 들어 백발이 성성해지는 모습까지 운 좋으면 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가 몇 살이 되든, 이렇게 손바닥만 한 사이즈로 세상에 나와 그저 나의 냄새만을 위안 삼아서 쌔근쌔근하던 그 모습을 기억 속에서 지울 수가 없을 것이다.
자기도 이젠 다 컸다며 혈압을 올릴 때도 있을 것이고, 때론 나도 너도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할 날도 오겠지. 하지만 그때에도 너의 오래전 이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너를 세상으로 끄집어낸 것은 부인할 수 없이 '너'의 선택이 아닌 '우리'의 선택이었고, 내가 어떤 부족함이 있는 사람이었어도 너는 그저 나를 나라는 이유만으로 그저 좋아해 주고 정말 아무런 조건 없는 신뢰를 보내준 연약한 생명체였다는 것도.
# 축하해 준 고마운 마음들, 세상 모든 탄생이 얼마나 축복할 일인지 잊지 않을게 #
내가 자식을 원한 것보다 훨씬 더 손주를 간절히 기다리며 그 아이가 누구든 나오기도 전부터 이미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쏟을 준비를 해온 양가 부모님들, 그리고 탄생의 기쁨을 직간접적으로 이미 겪어봐서 누구보다 잘 알기에 진심으로 축하해 준 사람들, 그 아름답고 감사한 마음들을 살면서 계속 잊지 않기를. 특히 앞으로 갚을 기회가 딱히 있을 것 같지도 않거나, 막상 그들을 축복할 기회를 놓친 상태인 사람들이 축하를 해 주고 심지어 선물까지 보내주어 때론 황송하기도 했다는 것도 잊지 말기를.
주고받을 수 없는 관계라도 진심으로 축복할 일이 있을 땐 절대로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살피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이가 생긴다는 사실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얼마나 축복할 일인지 예전에는 솔직히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이제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로 인해 그만큼 세상을 이해하는 감정의 폭이 더 깊어진 것도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오늘 아침도, 빨간 날조차 하루도 예외 없이 나는 매일 이른 아침 출근 준비를 한다. 눈을 뜨자마자 꼼꼼하게 세수를 하고, 잔머리 없이 깔끔히 머리를 빗어 올리고, 경쾌한 음악을 들으며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는 것으로 그 의식은 완성이 된다. 이제 가자, 통근이 필요 없는 우리 집으로, 나의 유일하고 가장 중요한 고객인 너를 활짝 웃으며 맞이하러. 우리 아들, 오늘도 엄마랑 한 번 잘해보자!
※ 세상 모두의 순산 및 행복한 육아를 기원하며, 그런 마음으로 그 이후 아이를 키우면서 직접 제가 출간한 책 "육아, 겁내지 말자"도 관심 있으시면 참고해 보신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광고비 전혀 없는 자가 출판만으로도 Yes24의 임신/출산 22위까지 찍었고 카테고리 베스트셀러 타이틀도 상당히 오래 유지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