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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물고기 Jan 28. 2020

탄생에 마주하여 인생의 끝을 느껴보다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을 생각하다

평생 병원 신세 질 일 없이 참 감사한 삶을 살아오다가 출산 전 무려 3주를 꽉 채워 입원을 하게 되었다. 중병으로 내 몸이 너무 아파서는 아니었고, 거의 두 달 후에나 나오기로 되어있는 아기가  세상에 너무 빨리 나와버리게 될 수도 있는 위험이 발생하여 그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위함이었다. 하나의 생명이 아직 모든 것이 덜 익은 채 세상에 내던져지게 하여, 처음부터 험난한 고통을 지고 평생을 시작하게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무사히 고비를 넘기고 결국 퇴원을 하게 되었지만, 한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기 위한 지난 입원 기간 동안 나는 정 반대의 목적, 그러니까 인생의 죽음을 기다리기 위한 '마지막 입원'에 대해서도 동시에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 공통점: 기약할 수 없음 #


이 생에서의 삶을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듯이, 죽음 역시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 나의 아이가 실제로 '정확히 언제' 세상에 나오게 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나나 부모님 그리고 우리의 무수한 선조들도 그들이 언제 죽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날, 어느 시'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있고, 그의 결과로 '어느 날, 어느 시'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남을 뿐이다.


물론 요즘은 온전히 하늘의 선택이라기엔, 선택적으로 미리 날을 정해 제왕 절개 수술이라는 방법으로 자식이 세상의 첫 빛을 보게 하는 방법과, 인생을 그만 살아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자살을 하는 방법으로 인간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경우도 점점 많아지기는 한다.


하지만 어쩌면 '어느 날 어떤 방법으로 세상과 만나고 이별하겠다'고 하는 마음이 드는 것조차도 어쩌면 개인의 세부적인 운명의 지도에 쓰여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삶이 그랬듯 죽음 또한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냥 오늘 또 한 번 주어진 하루를 그저 덤으로 얻게 된 선물처럼 받아들이고 이왕이면 행복으로 채워보는 것이 어떨까.


# 만남, 그리고 헤어짐 #


출산의 기다림 끝에는 그리던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 그 만남은 인연이 소중한 만큼 매우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성사될 수 있다. 단지 모체의 배 안에서 바깥으로 그 몇 센티되지도 않은 길만 지나오면 쉽게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 길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할 만큼 극한의 고통을 지불할 때야 비로소 건널 수 있는, 요즘도 그 과정에서 여전히 일부는 실제 목숨을 잃기도 하는, 엄청나게 험한 길이다.


그러나 실제 겪은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후에 하는 말은 그래도 '지불할 가치가 있는 고통이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그만큼 소중하고, 또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운명의 끈 같은 게 정말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반면 임종의 기다림 끝에는 짧은 생을 사는 동안 맺었던 무수한 인연들과의 이별이 예정되어 있다. 물론 사후에 대한 믿음 여부에 따라 그것을 '헤어짐'으로 받아들일지, '잠시 먼저 가는 것'으로 받아들일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동안 서로 알고 있던 물리적인 형체의 모습으로 상호 간에 똑같이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는 마지막이라는 사실이다.


급격한 이별은 남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회한을 줄 것이고, 지난한 이별은 떠나는 자에게 더 긴 고통과 외로움을 주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선택권이 있다면 이왕이면 내가 좀 더 길게 괴로움을 겪더라도 남은 사람들에게 일말의 부담이 덜한 쪽이 더 축복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바람이 있다면 어차피 가는 마당에 이름을 남기고, 업적을 세우고, 대단한 기억을 남기고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을 것 같고, 그냥 주변인들에게 가는 날까지 금전적, 물리적인 피해나 부담을 주지 않으며 조용히 내가 떠날 정도의 몫 정도는 마련해 둔 상태였으면 좋겠다.  


# 우리는 모두 매일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


어쩌면 우리는 침상 한 칸짜리 입원을 해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든, 아니면 조금 더 넓은 반경에서 물리적인 자유를 약간 더 누리면서 활개를 치고 다니고 있든 마찬가지로, 모두가 똑같이 시한부 인생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내가 입원해 있던 3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래도 힘들다는 생각 없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을 나가면' 나는 원하던 대로 자격증 시험을 볼 수도 있고, 각종 링거 주사를 훨훨 떨쳐 버리고 멀쩡한 두 다리로 멋진 세상 마음껏 싸돌아 다닐 수도 있고, 주어진 병원 밥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도 한 껏 먹을 수 있고, 못 보던 얼굴들도 자유롭게 만나고, 열 달간 기다려온 새롭고 반가운 인연을 만날 수도 있다는 희망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것이 내 생의 마지막이 되는 입원이었다면, 그 고통과 기다림의 끝에는 단 하나, '가 보기 전에는 절대로 알 수 없는 미지의' 죽음이라는 것만이 오롯이 있다고 생각하니, 거쳐간 사람들의 그 기다림의 시간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힘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더 이상 자유의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단지 희미해져 가는 의식만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시간을 연장하며 버티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런 기간을 상당히 오래 보내다 결국 떠나셨던 나의 할아버지, 그리고 본인이 보살펴야 할 대상이자 원망이라도 할 상대가 떠나자마자 급속히 생명력이 꺼져 얼마 후 바로 뒤따라 가셨던 할머니를 떠올려 본다. 또한 거동이 상당히 불편하고 동시에 꽤나 또렷한 의식이 왔다 갔다 한 채로 요양원에 계셨던 우리 100세 시할머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 역시 인생의 끝자락에는 병원에서 연명하며 기다림을 맞이할 운명이라면,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그 몇 주 입원을 해 있던 동안에도, 뜻하지 않게 주어진 시간을 즐기기보단 허송세월 하기 싫어 외국어 공부를 하고, 약물에 대한 해외 문헌을 뒤져가며 연구를 하고, 실용서 위주의 책을 읽을 정도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는 나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삶에 대한 미련은 늘 별로 없다고 생각하며 당장 오늘 죽는 대도 회한이 남을 것 같거나 두렵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이제 나를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될 한 생명이 세상에 나온다고 생각하니, 그리고 부모가 내게 투여했을 그 많은 인고와 피땀이 예전보다는 점점 더 진지하게 다가올 것이라 생각되니, 내 인생이 조금은 더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내가 '누구 때문에' 산다는 오랜 어른들의 말씀을 이해하고, 직접 되뇔 정도의 나이가 든 것이다. 자식을 갖는다는 것은, 인생에서 내가 진 빚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한 번 제대로 측정해 볼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이렇게 인류는 빚을 대물림 하는 역사를 이어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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