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웅 선생
김대웅 선생이 별세하셨다. 선생은 1985년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번역하였는데, 이는 국내 최초 마르크스-엥겔스 원전 번역본이다. 군사독재 정권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엄혹한 시기에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이 책의 번역 이후 국내에 마르크스-엥겔스 원전 번역 붐이 일어났다고 하니 책 한 권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가 얼마나 큰지 다시금 일깨운다. 선생의 번역 대표작은 마르크스/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이다. "역사적 유물론의 방법 및 그에 따른 인간 사회의 발전사를 처음으로 체계화시킨 역작으로 평가"받는 마르크스/엥겔스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90년대 후반 학번인 나는 소위 학생운동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는 못했다. 물론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여전히 학내에 이른바 운동권은 존재하고 있었고, 운동권이 주도하는 집회도 적지 않게 있었다. 동기 중에는 집회에 꽤나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친구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퀴퀴한 분위기의 과방에 놓여 있던 '날적이'의 이름도 '맑써'였다. 80년대 운동권 선배들이 과에 남겨 놓은 전통이나 유산이었겠지만, '날적이'의 이름이 '맑써'였던 것을 보면,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완전히 죽지는 않았던 상황이었다(기억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학내에 맑스주의 공부 모임도 있었다.).
그러나 때는 90년대 후반이다. 동유럽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은 몰락했고, 우리나라는 IMF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대놓고 "부자 되세요"라고 외치는 광고가 나오는 세상이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휘몰아치고 있던 때였다. 사상의 유행에 대단히 민감한 우리나라 학계는 그에 발맞춰 미국식으로 변형된 프랑스 사상(소위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을 재빠르게 들여왔다. 이제 마르크스는 곰팡내 풀풀 나는 한물간 사상가 취급을 받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무덤 위에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깃발이 꽂혔다. 마르크스를 읽는 것은 촌스러운 일이었고, 세련된 대학생이라면 보드리야르, 리오타르 정도는 읽어줘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학 내 서점에서는 다행히 여전히 마르크스 관련 서적을 꽤 많이 팔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은 절대 구할 수 없을 백산서당이라는 출판사에서 영한대역 시리즈로 나온 <공산당 선언>, <포이에르바하>, <임노동과 자본>, <임금/가격/이윤>을 산 것도 학내 서점이었다. 김대웅 선생의 부고를 알리는 기사를 통해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이 출판사 백산서당의 설립에도 김대웅 선생이 관여를 했다고 한다. 마르크스 전기의 결정판이라 할 <마르크스 전기>(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소 지음)도 선생의 번역이다. 일면식도 없지만, 선생 덕분에 좋은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감사한 마음이다.
선생의 평생 꿈은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을 번역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꿈을 이루고 가셨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다. 선생은 투병중일 때 종종 "즐거운 인생이었다. 누워있어서 미안하다. 다들 한잔하자."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을 선생의 장례식에 오는 이들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즐겁게 살기가 어려운 세상이고, 시절이다. 하지만 기왕 사는 인생, 즐겁게 사는 게 좋지 않을까. 주어진 시간을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살아봐야겠다.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일단 한잔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