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에 있었던 일이다.
도서관과 마트를 다녀와서,
모래 놀이 노래를 부르는 아이를 데리고
집 밖으로 나왔다.
아내는 약기운으로 피곤해하길래,
집에서 쉬라 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집 근처에 위치한
'화랑공원' 이라는 곳이었다.
차로 5분 밖에 안 걸리는 데다가,
공원이 무척 크고,
그 안에는 큰 놀이터가 있어서 아이가 좋아했다.
아이는 모래 놀이 놀이감을 들고,
나는 돗자리와 의자를 카트에 싣고 공원에 도착했다.
요즘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공원 곳곳에 행사가 한창이었다.
자기 계발 모임인지 단체 행사가 있었고,
아이들이 색색깔로 옷을 입고 활동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기분 좋게 놀이터에 당도했는데,
'DANGER'라는 긴 테이프만 둘러 있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임시 점검 기간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애써 당황한 마음을 감추고,
집 근처에 있는 모래 놀이터로 가자 했다.
사실 모래 놀이보다는,
그보다 조금 더 가면 있는
탄천 근처의 제법 큰 놀이터에서
아이를 놀게 할 작정이었다.
그곳엔 또래 아이들이 많았고,
아이가 아빠를 찾지 않고 친구들과 놀겠거니 했다.
그럼 그 사이,
나는 느긋하게 책을 읽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아이는 원래 아빠가 기대했던 큰 놀이터는커녕,
그 직전의 모래 놀이터도 아니고,
우리 집과 가장 가깝고, 제일 외딴 놀이터를 선택했다.
외져 있어서 항상 비어 있던 그 놀이터를.
'잠깐 하고 이동하겠지' 하고 시작한 모래놀이는
쉬이 끝나질 않았다.
직전에 도서관에서 읽은
빙하와 타이타닉호의 침몰 일화를 꺼내며,
마구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나에게 배를 주고서는,
빙산이 사방에 깔려 있으니, 피해서 출항하란다.
그리하여 나는, 배는 곧 출항했고,
항해란 것이 원래 한번 시작하면
오래 걸리는 것이기에,
몇 달 있다가 다시 돌아오겠노라 하고,
잠시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아이는 연신 외쳐댄다.
"아빠~ 3년 후에 와~"
"아빠~ 1년 남았어~"
"아빠~ 3달 남았어~"
"아빠, 이제 와!"
그렇게 아이와 모래 놀이터에서
남극대륙을 쉬지 않고 몇 번이나 탐험했다.
곧 딴 데 가자고 하겠지 하고,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었다.
배를 정박 시키고 책을 읽다가,
아이가 부르면 또 출항하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놀기를 3시간여.
놀이터를 비추던 햇빛은
이제 아이 몸집 크기만큼 작아졌고,
다른 놀이터로 잠시 이동했다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내 아들이 조금 이상했다.
원래 밖에서 놀고 나서,
"집에 가면 바로 씻자" 약속했어도,
집에만 들어서면 샤워하기 싫다고 신경전을 벌이고,
막상 샤워를 시작해도,
눈에 물이 들어간다, 코에 물이 들어간다,
아주 아우성이었던 아이였다.
그러고 밥상을 차려 놓으면 먹는 둥 마는 둥,
간식에만 관심이 쏠려서,
밥 안 먹으면 간식 없단 말에 인상 쓰며 겨우 밥을 먹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돌아오자마자 아빠보다 빠르게 옷을 벗고,
"아빠, 내가 눈 꼭 감고 있으면 물 하나도 안 들어와!"
라며 아주 씩씩하게 샤워하고,
질색하던 샐러드도 자발적으로 먹겠다고 하더니,
엄마가 차려준 월남쌈을 아주아주 맛있게, 그리고 복스럽게 먹는 게 아닌가.
완전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급이다.
그러고는 옆에 꼭 붙어서, 연신 조잘댔다.
"아빠 나랑 옆에 앉자."
"아빠가 나랑 잘 놀아줘서, 오늘은 아빠가 제일 좋아~ "
"난 아빠가 제일 소중해."
생각해 보면 나는 오늘 딱히
아이와 잘 놀아준 건 없었다.
아이가 하고 싶다던 놀이를 할 수 있게 데려가 줬고,
충분히 놀 수 있게 시간을 줬을 뿐이다.
놀이터에서 아이의 역할 놀이에 일부 참여했지만,
그 절반은 그늘 의자에 앉아 책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오늘 너무 좋았다 했다.
아이의 반응에 얼떨떨하면서도,
네가 좋으니 나도 좋다 했다.
옆에서 보던 아내는 살짝 질투가 난 기색이다.
"오늘 아빠가 엄~청 재밌게 놀아줬나 보구나~"
근데 막상 난 별로 한 게 없었다.
그저 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
문득, 육아라는 게 그런 건가 싶었다.
그만하라고, 여기까지만 하라고
제한하면 더 튀어 오르고,
오히려 아이가 원하는 걸 원하는 만큼
충분히 하게 해주면,
알아서 되는, 그런 건가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