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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동이맘 Aug 01. 2024

도와주지 않을 거면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신생아를 돌본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주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받고 염치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말아라!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같은 시기에 임신해서 출산까지 같이 한 친구가 있었는데, 나는 정말이지 그 친구가 너무 많이 부러웠다. 출산하고 병원 1주일 입원, 산후조리원 2주, 산후도우미 3주. 친정엄마와 시어머니도 적극 도와주셨고 말이다.

 

 난 그 친구가 부러워 미칠 것 같았다.

 산후조리원 2주 후부터 홀로 아이를 돌보는데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연약한 아이를 데리고 있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아침이고 밤이고 아이를 돌보느라 잠도 잘 수 없고 밥도 먹을 수 없었으며 씻거나 생리적인 현상을 처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친구는 아침에 산후도우미 이모님이 오시면 아이를 맡기고 잠을 자거나 병원을 다녀오거나 하며 볼일을 볼 약간의 틈이 존재했다. 난 그것이 너무나 갈망했고 원했지만 가질 수 없었고 친구는 쉽게 가진 것 같아 속상하고 서러웠다. 같은 신생아를 돌보는 엄마인데 이렇게까지 차이가 난다니! 절망했다.

 

 집에 오고 한 달쯤 되었던 때 방에 아이랑 단 둘이 있었는데 문득 안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순간 아이가 울기 시작했고 창문을 열어 던져버리고 싶었다.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었으며 아이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진 것 같아 원망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더라!

 찰나였지만 소름이 돋았다.

 힘들게 낳은 내 새끼를 억장이 무너지고 그때만큼 마음이 무너진 적이 없었다. 한참을 아이를 안고 꺼이꺼이 울었다. 울다 보니 속이 풀렸고 아이를 달래며 분유를 타서 먹였다. 그리곤 친정엄마에게 전활 걸어 너무 힘드니 도와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대답은... 원하는 것이 아닌 질타만 이어졌다.


 "집에 와서 조리하라니까 안 오고선 무슨 헛소리야?"

 "왜 너만 유난이니? 넌 너무 예민해! 다들 그렇게 애 키운다. 나는 일하면서 너흴 다 키웠어~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 알겠지!"


 조리원에 있을 때 친정엄마는 나에게 한 달만 조리하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말을 하긴 하셨다.

 하지만 아이랑 있을 공간이 없다. 내 방은 이미 친정아빠의 서재 겸 작업실로 변해있었으니 따로 지낼 공간이 없었다. 거기다 말만 아이랑 오라고 하시지만 정작 신생아를 맞을 준비는 하나도 하지 않으셨다. 나보고 알아서 준비해서 가져와서 알아서 세팅하고 아이랑 들어오라는 것인데 그럴 짬도 그럴 체력도 남아있지 않아 거절했다.

 또 친정엄마는 조그마한 가게를 운영 중이신데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셨는데 일찍 오시면 8시요 기본 9시쯤에 퇴근하시는 분이셨다. 그럼 하루종일 아이랑 둘이 있는 건 여기나 저기나 매한가지인데 어디가 조리를 해준다는 것인지... 무엇보다 신생아 옷이랑 손수건이랑 기타 옷들과 장난감들 미리 소독하고 빨래해 놓으시고 모유수유에 유축도 해야 돼서 공간도 필요하다 준비 좀 해달라 했더니 역정을 내셨다.

 

"라테는~~ 그런 거 없어도 애 잘만 키웠다."


 우리 엄마가 꼰대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한 날이었다.


 살면서 '엄마'에게 간절히 도움을 요청한 것이 2번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아팠을 때였다.

 그때는 발바닥에 사마귀인 줄 모르고 민간요법과 병원에서의 오인으로 병을 아주 심하게 키우게 되었는데 족저사마귀가 발바닥 전체에 퍼져서 손 쓸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는 수 없이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대학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다녔는데 그 기간이 무려 2년이다. 사마귀를 다 없애는데 1년이 더 걸려 3년 동안 폐인생활을 했었더랬다.

 2주에 한 번 병원에 가서 냉동치료 혹은 면역치료, 주사치료를 받았는데 그게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치료를 받고 나면 발바닥에 불이 난 것 같아 걸을 수가 없었다. 같이 병원 좀 가달라 혼자 다니기 힘들다고 했지만 가족 그 누구도 나와 함께 한 번을 같이 병원에 가 준 적이 없었다.

 일을 하지 않으니 수입원도 없고 그렇다고 집에서 용돈을 주지도 않아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치료비와 용돈을 써야 했다. 처음엔 미련하게 돈이 아까워 택시 타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는데 병원에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갈아탄 다음 집으로 걸어와야 했다. 그 당시 내 걸음 속도는 횡단보도에 초록불이 켜지면 건너기 시작해서 빨간불이 바뀌어 갈 때까지 다 건너지 못했다. 쩔뚝쩔뚝 악착같이 걸어 집으로 가면서 힘들어 주저앉기도 여러 번 했었다.

 당시에는 사지가 멀쩡한데 집에서 노는 '딸'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아 하셨는데 동네사람들 보기 창피하다고 얼굴만 보면 막말을 쏟아내시는데 집에 있으면 괴롭고 힘들었다.

 그 생활을 2년을 하니 돈이 똑 떨어졌다. 엄마에게 부탁을 해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하고 냉정한 얼굴뿐이라 알바를 구했다. 알바를 몇 개월 하고 돈을 모아 레이저치료를 받았다. 또 알바를 해서 몇 개월 돈을 모아 레이저치료를 받고 그렇게 3번의 레이저치료를 마지막으로 난 드디어 족저사마귀와 안녕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 좀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너무 힘들다고,


돌아온 것은 "해 줄 수 없다."뿐 그 이후로 친정엄마에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도움을 바라지도 않을 것이며 내 가족은 이제 아이와 신랑뿐!이라고 생각하며 살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도리어 머리가 맑아지고 편해진 느낌이었다.


 출산은 쉽게 했는데 임신이 힘들었고 홀로 아이를 돌보려니 내 몸을 돌볼 수가 없었다. 냉탕과 온탕을 수시로 넘나들어서 땀을 쏟다가도 오한이 들어 춥다가도 호르몬의 영향인지 감정도 널뛰기가 그런 널뛰기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육아에 많은 힘을 보태주던 신랑이... 회사에서 잠시 눈을 붙였는데, (회사사람들은 힘내라면서 신랑한테 조금씩 눈 좀 붙이라며 알게 모르게 배려를 해주고 있던 상황였다.) 그때 대표에게 딱 걸렸다. 아주 된 통으로 욕을 한 바가지를 얻어먹었나 보다.

 덕분에 나는 진짜 홀로 육아를 도맡아서 하게 되었다.


 몸이 힘들어서일까? 못 먹어서일까? 모유양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는데 수유텀을 한 번 넘기자 바로 젖이 말랐다. 그래서 모유를 끊고 분유만 줬다. 안 나오는데 어찌 먹일까?

 그래도 우리 아들은 모유든 분유든 잘 먹긴 먹었다. 크게 아픈 곳도 없었고 응아를 못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른 큰 복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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