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안타깝고 그래도 애쓰면서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응원해주고 싶고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낍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고 열심히 산다고 쉬지 않고 달려온 것 같은데,
지나온 길을 보면 왜 이렇게 아쉽고 좀 더 열심히 할 수 있지 않았나!라는 후회만 남게 될까요?
처음으로 갖은 직업은 '학습지교사'였습니다.
대학졸업하고 갓 취업한 것이라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요. 팀장님이 개인적으로 대출을 받아 빌려달라고 한 달을 쫓아다녔는데, 그 스트레스 때문인지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입원을 했을 때 퇴사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더니 일사천리로 진행해 주더군요. 그전에 '퇴사'얘기만 나오면 사람을 달달 볶더니 말입니다.
신입이 얼마 안 가 그만두게 되면 인사평가에 안 좋은 영향이 가는 것인지 무조건 3년을 버티라고 협박하던 팀장였는데, 씁쓸했습니다.
파란만장한 첫 직장을 종료하고 서점에서 캐셔로 근무를 했는데, 그저 '책'이 좋아 입사한 곳이었지만 내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았고 계속 캐셔로만 일하기엔 '내'가 너무 아까웠습니다. 캐셔는 정직원이었지만 그 이상의 직급은 가질 수 없었습니다. 나보다 안 좋은 대학을 나온 남자직원들은 출발선부터 달랐지요. 그 사실이 무척이나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또 일머리가 없어 계속 지적만 받으니 도통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죠.
그렇게 두 번째 직장도 관두고 한참을 방황했습니다.
늦게 온 사춘기를 심하게 앓고 있던 내가 더 이상 나이가 들기 전에 '작가'가 되야겠다!라고 문득 생각이 들더군요.
소설작가가 꿈이었지만, 방송작가로 방향을 잡고 방송아카데미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몇 개월은 꿈만 같았고 진짜 드라마작가가 된 듯 열심히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돈이 없는 가난한 청년이자 부모님에게 의지하며 사는 캥거루족일 뿐이었죠.
결국 방송작가가 되겠다고 공부를 시작한 지 반년도 안되어서 다시 일을 하러 나갔습니다. 이번엔 전혀 다른 길인 '바리스타'로 말이죠.
전통차, 허브티, 커피에 관심이 생겨 인사동에 있는 전통찻집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녔는데, 그게 계기가 되어 찻집에서 차를 끓이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꽤 오랫동안 차도 끓이고 점장역할도 해보고 바지사장도 해보며 참 재미나게 지냈습니다.
그러다 망했고 절망하던 때 신랑을 만나 '결혼'을 합니다.
결혼과 임신은 축복이었지만 온전히 그 사랑을 누릴 수 없었고, 아이가 태어난 후로 '내'가 없어진 것 같아 많이 속상하고 괴로웠습니다.
자유는 박탈당하고 오로지 '아이'중심으로 돌아가는 생활이 견딜 수 없었고 어느 것 하나 홀로 할 수 없음에 분노를 느끼기도 했지요.
그게 뭐라고 그때는 왜 분개했을까요?
결혼하고 한 사람의 '엄마'가 되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된 것이 뭐가 그리 아쉽고 서럽고 분했을까요.
이것 또한 우습게도 열심히 삽질을 했습니다.
땅을 파고 또 파고 부단히도 열심히 땅굴을 파고 들어갔지요.
지금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새끼 이것만... 절대 '나'는 사라지지 않는데, 내 이름은 우습게도 우리 아들이 열심히 불러주고 있는데 말이죠.
정신 차리고 세상에 나오고 보니 아 글쎄
엄마면서 아이를 잘 보지, 잘 키우지 라는 비난을 들어야 합니까?
난, 열심히 산 것 밖에 없는데 왜 이런 비난을 들어야 하는지! 자기 연민에 빠져 잘못하지도 않고 잘 크고 있는 우리 아들이 밉고 왜 내가 이 아이 때문에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다행히도 나에게는 신랑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으며 이런 덜떨어진 나를 지켜주는, 나에게도 '엄마'라는 존재가 있었답니다.
지금도 지나온 길을 보면 '후회'만 남습니다. 조금 더 버텨볼 걸 조금만 더 인내해 볼 걸 하고 말이죠.
이런 부족한 '엄마'지만, 온몸으로 의지하는 우리 아들과 신랑이 있는 한 힘을 내어 앞으로 나아가야겠죠.
오늘의 해가 졌다고 해서 그 해가 다시 뜨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내일 해는 반드시 또 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