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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파커 Jul 20. 2022

나의 우아하고 지적인 실연 극복기

마크 트웨인 ‘아담과 이브의 일기’

실연에 ‘반응하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극복하는 법’이라 썼다가, 바꿨다. 이게 이겨낼 일인가 싶어서. 이리저리 몸부림치다가 결국 시간만 승자가 되는 싸움 아닌가. 그 필패의 전투에 나선 사람을 지켜보는 건 안쓰럽고도 흥미롭다. 대부분 뭔가에 의지한다. 술, 음악, 운동, 일 혹은 사람에게.

나는 책을 읽었다. 매일 시내  대형서점에  책을 샀고 카페에 앉아  시간씩 읽다가 돌아왔다.  얼마나 지적인 실연 극복기인가. 물론 책이 눈에 들어올 무렵이란 언제나  폭풍은 지나간 후다. 가장 먼저 찾아오는 증상은 곡기를 끊는 . 그리고 이별 노래를  찾아 들었고(울었고), 아침부터 강소주를 마시며 했던 하고  했다( 한다). 그러고보니 빈속은 위험하다며 옆에서 김밥을 입에 넣어준 친구가 있었다. 벌써 오래오래  일이지만, 새삼 고맙다.


내 슬픔이 너무 커 부끄러움도 염치도 잊었더랬다. 나는 가족들에게 용돈을 왕창 뜯어냈고, 거리 전도를 하던 교인들에게 먼저 다가가(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기도 부탁을 하기도 했다. 또, 서울 시내 미술관을 정처없이 떠돌며 방명록마다 구구절절 내(가 헤어진) 얘기를 쓰는 ‘이상 행동’도 보였다.

식욕이 돌아오고, 간신히 미술관을 끊은 후, 비로소 책을 읽었다.  목록은 좀 엉뚱하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이것은 도피성 독서인가),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연애를 사소하게 만들어 버리려는 정신승리),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것은 아무래도 시기상조였다) 등.


하지만 낮아진 자존감과 자라난 냉소 탓에 뭘 읽어도 목구멍에 걸린 김밥처럼 텁텁했다. 그러다 만난 ‘인생 책’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자연의 선택, 지나 사피엔스’(들녘)였다. 시집도 아니고, 말랑한 연애 에세이도 아니고, 500쪽이 넘는 인류학책이라니. 사랑을 잃고 읽은 책이라기엔 다소 괴상하지 않나.미술관 방명록에 일기 쓰고 다녔던 것만큼 황당하겠지만. 진짜다.


‘호모 사피엔스(현명한 남자)’의 대척점에 여성의 선조 ‘지나 사피엔스’를 세우고, 여성이 인류 진화의 주체라는 가설에서 출발하는 책은 내가 부여잡고 있던 ‘실패한 연애’에서 잠시 나를 떨어트려 놓았다. 남녀 관계를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풀면서도, 시간과 죽음의 개념을 먼저 터득한 지나 사피엔스(여성)를 항상 우위에 두고 전개되는 이야기는 나의 괴로움을 ‘사사로운 것’으로 바꿨다. 내 연애의 시작과 끝이 자연의 일부처럼 당연해지니, 평온도 찾아왔다. “그래 이건 사랑이 아니야. 난 단지 철분이 부족했을 뿐”(책에 나오는 가설 중 하나다)이라며 아무도 웃지 않는 농담도 했다. 아, 혹시 지금, 이 책이 간절한가. 미안하지만, 절판이다.

대신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 마크 트웨인의 ‘아담과 이브의 일기’(문학동네)다. 짧은 소설 ‘아담의 일기 발췌’와 ‘이브의 일기’를 함께 수록한 책은 기독교신화를 기반으로 한 인류의 탄생,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 등을 유머러스하게 비튼다. 접하는 모든 것이 처음인 아담과 이브는 서로를 떠름하게 보다가 피조물, 파충류, 그것 등으로 부르고, “게으르고 저속하다” “쉴새 없이 재잘댄다”며 반감을 표하기도 하지만, 끝내 오해와 무지를 넘어 ‘우리’가 된다. 진화를 이끈 존재인 ‘지나 사피엔스’가 아담보다 먼저 깨어난 ‘이브’와 겹쳐졌다. 또, ‘남자’와 ‘여자’를 연구하는 게 아니라, ‘인류’를 먼저 이해해야 ‘다른 존재’를 견딜 수 있다는 메시지도 비슷하다. 그런데 이건 연애소설이 아니지 않냐고. 트웨인은 아내가 세상을 뜬 후 “나는 나라(아내) 잃은 남자”라고 고백하며 이 소설들을 썼다. 또, 아담의 일기 마지막 장은 이렇게 끝난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 그곳이 에덴동산이었노라.” 연애소설 맞다. 그리고 ‘자연의 선택, 지나 사피엔스’는 연애의 참고서 정도는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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