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타인의 섹스를 비웃지마라'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사람이 있다. 영화가 좋으면 원작까지 읽기도 한다. 보면 또 새롭고, 더 좋아진다고. 멋지고 낭만적인데, 감정과 감성도 시간처럼 총량이 있다고 믿는 나로선, 따라 하기에는 좀 버거운 취미다. 아껴야지. 다른 것도 봐야지…. 쪼잔하게 들릴 걸 알면서 이런 얘기를 꺼낸 건, 내가 그 버거운 걸 해내서다. 넷플릭스 홈 화면 상단에서 날 유혹하던(알고리즘 탓이다) 일본 영화 ‘타인의 섹스를 비웃지 마라’를 봤고, 동명의 원작 소설도 읽었다. 그리고 다시 영화를 봤다. 물론 여기서부터는 일이지만.
눈길 가는 제목이다. ‘섹스’가 아니라 ‘비웃지 마라’는 부정명령형이 더 그렇다. 이건 유혹보다 ‘도발’이다. ‘네가 뭔데 웃어’라고 자극하니 ‘무슨 얘긴데 그래’ 하고 호기심이 인다. 영화가 좋아 소설까지 본 건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좀 이상(?)했다. 가령, ‘비웃을’ 섹스 장면 같은 건 아예 없다던가….
19세 미대생 미루메와 39세 미대 강사 유리. 막 성인이 된 남자와 스무 살 연상녀(그것도 유부녀)가 등장한다. (소설과 영화가 좀 다르지만) 수업에서 처음 만났고, 남자가 여자의 그림 모델을 하다가 ‘그런’ 사이가 된다. 요즘 이게 파격 축에도 못 끼는 것 같은데, 줄거리는 더 심심하다. 상황을 극복하려 애쓰는 것도 아니고, 편견을 딛고 사랑의 결실(그런 게 있다면) 같은 걸 맺는 것도 아니다. 그저 흔한 연애의 일상이 펼쳐진다. ‘특이한 관계’라고 꼭 ‘특이한 사랑’을 하겠나. 이들의 풍경은 지극히 평범하고, 연애라는 세계에서 진실은 그것뿐이다. 계절이 오가듯 달아올랐다 식는다. 비웃지 말라는 건 이건가. 다 그래, 별다를 게 없지. 제목이 날 비웃는다.
귀한 감정과 시간을 쏟아 소설 읽기를 잘했다 싶다. 소설 속 유리는 눈주름과 살집이 있는 아줌마인데, 영화에서는 열 살쯤 어려 보인다. 미루메도 본래 깡마르고 볼품없지만, 꽤 ‘이케멘(미남)’으로 나온다. 판타지와 클리셰가 덕지덕지 붙은 영화보다 원작이 3배는 괜찮으니, 한 번쯤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뻔한 이야기라고 비웃지 마라. 19세 미루메가 우리보다 더 잘 안다. 사랑이 불장난인 것도 알고, 유리의 마음이 먼저 식은 것도 알고, 사랑을 잃고 “사막 한가운데 있는 듯한 느낌”도 안다. 무엇보다, 이런 문장은 읽지 않으면 도통 알 수 없으니. “ 신이 잠자리에 든 인간들을 굽어살피다, 누군가 흔해 빠진 행동으로 자기에 취해 있는 것을 본다 해도, 나름대로는 진지하게 하고 있는 중일 테니까, 웃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사랑, 다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