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틴 로맨스 '오렌지 향은 바람을 타고'
“그래, 어울리지. 딱 지금 읽을 때야. 그래도 다음엔 이런 책은 안 돼.”
중학교 때 한 달에 한 번 책을 읽고, 감상문을 쓰는 시간이 있었다. 입학 후 첫 독서 수업에 내가 들고 간 건 하이틴 로맨스 ‘오렌지 향은 바람을 타고’였다. “어울린다”면서, 왜 안 되는 걸까. ‘○○선정, 중학생 권장도서’. 이런 게 아니라서? 혼자 곱씹는데, 옆 짝꿍이 가져온 책을 칭찬하는 선생님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 어울리지. 딱 지금 읽을 때야. 다들 앞으로 이런 책을 가져오도록.”
비슷한 전개, 다른 결말. 선생님은 아예 책을 높이 들어 반 전체에 보여줬다. 토마스 하디의 ‘테스’였다. 선생님! ‘오렌지 향…’도 ‘테스’도 사랑을 이야기하는 건 같잖아요!(라는 건 어디까지나 마음의 소리)
어른이 되고, 특히 책을 읽는 게 주 업무가 된 지금. 이 장면에 큰 의심은 없다. 양서를 읽히고 싶으셨던 마음도 이해 간다. 그리고 ‘테스’도 읽었다. 중요한 건 그 후 내게 ‘길티 플레저’(어떤 일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즐기는 심리)라는 게 생겼다는 거다. 사랑과 연애를 다룬 책, 그중에서도 여성의 시선으로, 여성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이야기를, 나는 읽고 있으나 읽지 않는 것으로 했다. 이것은 소설뿐만 아니라 만화나 영화로까지 확장돼, 한동안 지속됐다. 고등학생이 돼선 할리퀸 문고(젊고 부자에 키 크고 잘생긴 남자가 보통 주인공이다)를 열심히 봤는데, 집에서 읽을 때도 참고서 사이에 끼워 몰래 읽었다. 대학생 때는 약간의 ‘허세’도 장착. 소개팅을 하면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 대신 마니아적인 장르나 난해한 예술영화 제목을 읊었다. 만화도 그랬다. 누가 물으면 언제나 가장 꼭대기에 자리한 순정만화를 밀어내고, 공상과학(SF)이나 스포츠물을 대곤 했다. ‘요정 핑크’(내 인생 첫 순정만화다)보단 ‘슬램 덩크’나 ‘20세기 소년’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왠지 좀 더 ‘있어’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랑을 갈구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그게 내 ‘욕망’으로 비치는 건 ‘없어 보이는’ 것 같아서. “어울리지만 안 돼!”라던 그 말이 자꾸 귓속을 맴돌아서.
책장에서 진작 사라졌고 줄거리도 아롱거리지만, 제목만큼은 생생한 ‘오렌지 향은 바람을 타고’. 알고 보니 최고의 아동문학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비벌리 클리어리가 썼다. 그는 아동문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뉴베리상을 수차례나 수상했는데, 최근 이 상을 한국계 미국인 작가 태 켈러가 받아 화제가 됐다.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렇다 해도 그날 ‘테스’를 이길 순 없었겠지만. 절판된 책을 찾아 헤매다가 작가가 지난 3월 10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어린 날의 ‘길티 플레저’에서 벗어난 지 오래지만(어른의 세계엔 또 다른 종류의 길티 플레저가 차고 넘치니까), 이제야 ‘해방’된 기분이 든다. 기념으로 요즘 내 ‘길티 플레저’를 쏜다. 최근엔 웹소설에 꽂혀 있다. 절친과 바람난 남편에게 살해당한 주인공이 10년 전으로 돌아가 복수를 행하는 ‘내 남편과 결혼해줘’, 그리고 소설 속으로 들어간 주인공이 남주(남자주인공)와 사랑에 빠지는 ‘남주의 첫날밤을 가져버렸다’. 보자마자 하나는 회귀물, 하나는 빙의물이네, 하고 있다면 우린 아마도 같은 기쁨을 아는 사이다.